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나쓰 Apr 30. 2024

증평에서의 오후

“바닐라 라테 주세요. 따뜻한 거. 먹고 갈게요.”

주문을 하면서 이미 달콤한 바닐라향이 입속에 번진다. 진동벨이 울리는 시간을 기다리며 증평의 산과 하늘을 번갈아 가며 훔치다가 미동도 없는 호수에 물결을 일으킬 듯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카메라 줌 아웃을 하듯 등을 뒤로 밀어 눕듯이 앉아 한꺼번에 전체 뷰를 눈동자에 담아보려고 애를 쓴다. 


지금 나는 일개 물건이고 자연은 봄을 섬기는 사제와 같다. 너무 웅장하지도 거세지도 않은 풍경에 숙연해진다. 햇살도 일렁일 듯 바람이 불고 있는데 너무나 고요하고 안정적이다. 봄이 왜 자연에 깃드는지 온 마음을 다해 이해하고 있다. 꽃 한 송이 없이도 아름답고 인간의 손길하나 없이도 단정하고 우아하다. 사제가 원하면 내 넋을 빼두고 가는 것쯤 일도 아닐 듯싶다. 


주문한 라테를 받아와 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니 하얀 거품이 뭉게구름처럼 번져 타이핑하는 내 손등 위에 살포시 올라앉는다. 주변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가 보드라워진다. 완벽한 순간이다. 머릿속은 개운하고 공기는 달콤하고 주변은 온통 푸르다. 주에 한 번 정도 증평을 오고 있다. 아니, 증평이 나를 부르고 있다. 산속 깊숙이 있는 이곳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평생 내게 없었을 장소와 시간에 감사한다. 개발한다고 산등성이를 몇 개나 베었을까 싶어 안타깝다가도 여기 사제의 품에 안길 때의 그 포근함과 안정감이 좋아서 자꾸만 찾고 있다. 


SNS에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린다. 도시 안에서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그들에게 잠시 기쁨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좋은 마음이 움텄다. 나의 선물이 아닌 사제의 선물임을… 생색은 내가 내고 있다. 사제는 나 같은 좀도둑정도는 느긋이 품어준다. 창가에 앉아 있어도 햇살은 멀리 있었는데 어느새 가까이와 그늘을 덮쳤다. 타이핑하던 손놀림을 잠시 멈추고 창문에 달라붙은 햇살에 손을 살짝 올려본다. 새끼손가락과 손등, 옷을 겉어 올린 팔 위로 햇살이 살짝 닿는다. 따스함은 없지만 기분이 좋다.


나는 어쩌면 떠나기 싫어 이곳을 자꾸만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안면을 튼 지가 꽤 되다 보니 내게 한없이 다정하고 푸근하다. 나를 품어주는 사제에 나는 더 가까이 가지도 않고 멀리 있지도 않다. 늘 비슷한 거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가끔 눈을 마주치며 내게 베푸는 모든 아량에 감사하고 평안함을 즐긴다. 이 봄의 사제는 욕심이 없다. 그저 푸르르고 그저 머문다.


다음 주에도 나는 이곳에 와서 같은 카페에 들러 바닐라 라테를 주문하고 같은 풍경을 만날 것이다. 나는 또 감탄하고 감사하며 사제께 경의를 표하겠지. 오랫동안 빼앗기지 않는 시간이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낮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