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나쓰 May 02. 2024

살다 보면, 삶이란

어느 날에 생각하면 나는 너무 자랐고 어느 날에 생각하면 여전히 내 몸만 자랐구나 생각이 든다. 엄마가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통화를 한 뒤로 덤벙대는 나는 영락없는 어린애가 아닌가? 정작 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동생이 챙기고 나는 부랴부랴 쫓아가는 게 다였다. 수술이 끝나고 누워서 아파하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엄마의 한쪽 손에 가래를 뱉을 화장지를 접어 쥐어주는 것이 고작 내가 한 일이었다.


자그마한 엄마는 더 작아져 바닥으로 꺼져 버릴 듯 쪼그라지고 있었다. 엄마는 매일을 그렇게 작아지고 작아지고 사라질 때까지 작아지는 건가. 이마를 짚어보고 붓기가 남아있는 손가락을 내 손위에 올려보고 끌러져있는 윗도리의 윗 단추를 잠가주면서 지나치게 조용해져 있는 나를 느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만큼 위기와 고난과 죽음을 관망해야 하는 것일까? 아빠가 가시고 큰아버지 두 분이 돌아가시고 큰 외삼촌이 너무나 가슴 아픈 모습으로 떠나셨을 때 모두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애도뿐이었다. 내 아빠의 죽음은 어느 분의 그것보다 나를 더 괴롭게 했지만 죽음 자체는 같았다. 허망하고 허망했다. 엄마의 수술은 대단치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죽음과 진정 먼 일일까 의심하고 두려웠다.


살아있음이 진정한 괴로움 그 자체 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군가를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깐의 수술로 지나갈 수 있는 엄마의 상황이 너무나 감사했다. 한편 나는 벌어진 상황에 의젓하게 대처하는 동생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기대어 살고 있구나. 조용하게 엄마의 곁을 지키려는 나는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병상위에 앉아 간병인을 타박하는 아주머니와 시끌시끌하게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사람들과 기침을 하며 거친 숨소리를 내는 사람들로 머릿속이 빙빙 도는 작은 4인 병실에 앉아서 나는 엄마를 탈출시키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 부산스러운 공기를 벗어나야 엄마도 나도 진정 살 것 같았다. 간호사에게 쫓아가 1인실을 요청하고 옮겨지기까지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1인실로 엄마를 모시고 나서야 안정이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병상에 누워 있는 주름이 쭈글대는 나의 김여사가 더 이상 작아지지 않기를 바랐다. 삶은 종종 나를 갑작스레 혼란스럽게 한다. 그때마다 나는 테스트를 받는 느낌이다. 내가 삶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잘 살고 있는지 그런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고 있는지 삶이 내게 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풀어야 하는 답을 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열심히 고민하고 풀이를 하지만 항상 제대로 답을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고 벌어질 일은 또 벌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지혜로워 지기만을 바란다. 나와 내 삶이 자라야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지나야 할 과정을 슬기롭게 지나갈 테니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볕 좋던 한낮에 나는 잠시 길을 잃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증평에서의 오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