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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Jul 15. 2024

자리

지금 내 책상 위는 단정하지 않다. 여인의 찢어진 스타킹처럼 구멍이 난, 정돈되지 않은 너저분한 평상일뿐이다. 커피가 바닥에 들러붙을 것 같은 플라스틱컵과 두서없이 쌓여있는 책들, 그 책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책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노년, 반항인... 오른쪽 벽에는 나의 영원한 순수영혼 빨강머리 앤의 포스터가 기대어 있다. 삶의 수치를 두드리던 계산기도 놓여 있고 멈춰버린 탁상시계와 작은 공간에 울림을 만드는 연베이지 마샬엠프도 놓여 있다.


새벽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는 나의 영혼이 비집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자리한다. 나는 숨을 쉬고 그들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차이뿐.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은 영혼을 가졌을지 모를 물건들 사이에서 인생이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신처럼 그들을 놓아두었고 그들은 그 자리가 제 자리인 듯 무심히 살고 있다. 그중에서 생각을 하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지만 그 모든 물건들은 내게 생각이 되는 것들인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내게 미치지 못한다. 나는 일그러진 적도 있었고 굽어진 등을 스스로 펴고 일어선 적도 있었고 아무도 모르는 행복한 순간을 훔친 적도 있었다. 그 시간들과 감정을 나누지 않았던 탓에 나의 생각과 삶에 깊이 닿는 사람이 없다. 주변인들에게 나란 사람은 마지막까지 낯선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의 인생에 인간애와 동정이 저절로 우러나는 인간미 있는 사람의 일종이지만 그것이 내가 다른 이들을 더 이해하고 마음에 공명을 일으킬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그들에게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빨강머리 앤 포스터가, 멈춰버린 시계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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