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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Jul 18. 2024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를 읽다가

서너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한 단락 단락에 눈동자를 찍어가며 소리 내어 읽었고 속도도 적당했는데 읽은 페이지에 글자가 없었던 듯 한 문장도 남지 않았다. 느낌만이 남아있다. 문장의 흐름이 매끄러워 보트를 타고 잔잔히 물이 흐르는 계곡을 내려가듯 페이지를 넘겨왔다.


페이지를 다시 돌아가 읽으려다가 멈췄다. 나의 껍데기를 뚫고 어디엔가 스며들지 않았을까 이상한 믿음을 갖는다. 내게 이런 믿음을 주는 글이 좋다. 명언을 쥐어짜듯 만들어진 글귀가 글의 대표 문장인 듯, 대문인 듯 우뚝 서있는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글이 좋다. 간혹 그런 글을 본다. 자신의 의도가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써내려 간, 오만한 문장들이 즐비해 토가 나올듯한.


그런 글에는 작가의 진솔함도, 영혼의 가벼움도 없다. 단어와 문구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작가의 글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지도 않고 혼이 나고 싶지도 않다. 작가의 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건 허락한다. 작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이 걸리적거리지 않게 엮어낸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배 당한다. 글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쏟아 넣으려 애썼다는 의미이다. 


나는 작가의 사생활이 궁금하지 않고 작가의 이력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나의 심장을 붙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만일 것이다. 글은 내게 휴식이 되어야 하며 영혼의 밥이어야 하며 오락거리여야 한다. 내가 읽는 책의 글은 나의 부족한 글보다 적어도 조금은 더 의식이 있어야 하며 자유로워야 하며 무지갯빛이어야 한다. 타인의 글을 읽는 나의 시간은 옳고 그름에 투자되지 않는다.


글에 취해 오늘도 한나절을 보낸다. 무의식에라도 읽게 되는 책을 만나 너무나 기쁜 마음이다. 책의 얼마만큼을 오늘 읽겠다는 의지 따위는 없다. 나는 취했고 허기지다. 배고픔이 달래질 때까지 읽고 멈춰지면 또 멈추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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