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경계를 정하는 일도 작가의 몫이다

특별함을 주는, 평범한 문장들

by 보나쓰
문학작품이 예술적으로 완벽할수록 덜 대중적이기 마련이다.
P.214 '이명의 탄생' 페르난두 페소아

이 말은 페르난두 페소아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밀턴의 ‘실낙원’을 비교하며, 그의 또 다른 자아인 히카르두 헤이스의 입을 빌려 남긴 문장이다. 놀라운 것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이 오래된 고민이 시대를 초월해 반복된다는 점이다. 글을 쓸수록 나 역시 이 질문 앞에 머뭇거린다.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지는 걸까? 이 지점은 언제나 쉽게 넘을 수 없는, 사유의 언덕이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추상화보다는 선과 시선,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에 더 끌린다. 때로는 추상화 속 화가의 이상이나 내면을 읽어내려 애쓰는 일이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무수한 상념을 품은 추상화 앞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을 때, 오히려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위로란 정해진 틀에 갇힌 감정이 아니라, 내가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상태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때때로 추상화의 세계를 기웃거리게 된다.


글을 쓰면서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예술성이다. 히카르두 헤이스라는 인물을 창조해 낸 페소아의 시대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문학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여전히 다층적인 속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 어떤 문학은 반드시 대중의 시선을 끌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안내견의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독자를 계몽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어쩌면 언젠가 나는 대중적인 흐름을 파고드는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예술성을 놓지 않는 글을 쓰고 싶고, 그런 글을 사랑한다. 대중성이라는 것은 결국 ‘팔리는 글’이라는 의미일 테지만, 그 무게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 경계에서 어느 산을 넘을지 늘 망설이고 고민하는 작가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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