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혼자가 아니었으면 된 거다

특별함을 주는, 평범한 문장들

by 보나쓰
그 양반이나 나나 말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말은 아무 쓰임이 없었고, 우리는 할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냥 잠시 혼자가 아니었으면 된 거다 비록 어느 날과 똑같은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이런 날의 고독은 여느 날의 고독과 다른 법이다. P358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쉴 새 없이 참새처럼 떠든다. 만나면 인사하는 순간부터 무슨 말이든 쏟아낸다. 내가 모르는 자신의 지인 이야기부터,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까지. 나는 그녀가 내게 일기를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수다는 내가 말을 끊거나 화제를 돌리려 해도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잠깐 멈추는가 싶어도 금세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나는 가끔 그녀가 우리 대화의 몇 퍼센트나 기억할지 궁금해진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피곤했던 내 소중한 시간이 허투루 버려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녀를 만나고 흐물거리는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나는 온몸이 방전된 듯한 기분이 든다.


말이 많은 사람과 잘 들어주는 사람, 어떤 사람을 더 선호하는가?


누군가에게는 수다쟁이가 만남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줄 수도 있다. 반면, 잘 들어주는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고 호응해 주는 게 더 편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가끔은 자신도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나는 가끔 말없이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의 숨소리가 음악처럼 흐르고,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어떤 날은 그런 사람이 절실할 때가 있다. 자극이 없는 시간을 줄 수 있는 사람.


정말 평범하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지만, 타인과 어색하지 않게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서로가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드시 두 사람의 언어가 ‘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힘든 일을 겪는 사람에게 꼭 “힘내요”라는 말만이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도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서로에게 공기가 되어주고, 눈부신 빛을 가려주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시간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언젠가 산책하다가, 공원 벤치 끝에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초로의 여인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반대편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무슨 마음인지 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그 벤치 끄트머리에 앉았다.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저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혹시 불편할까 봐 눈을 감고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어떤 시점에 점처럼 찍힌 존재일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가끔 고개를 들어 나무 우듬지를 바라보고, 때로는 파르르 날아가는 새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나는 SNS를 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눈꺼풀을 통과한 강한 햇빛이 망막을 자극해 앞이 하얗게 되는 현상을 즐겼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떠 사물을 바라보면서 보게되는 첫 사물 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해 보면서.


나는 벤치에 기대다가 다리를 꼬고, 몸을 꼿꼿이 세워 앉아보기도 했다. 여자는 어느 순간, 들고 있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몇 페이지를 넘길 즈음, 나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서로에게 친구가 되고 위로가 되는 시간에 굳이 말이 필요하지는 않다. 조용히, 상대가 원할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것도 위안이고, 배려이며, 사랑이다. 그런 마음은 타인과도 통하고, 때로는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혼자는 싫어 누군가 필요한데, 조용히 있고 싶은 날.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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