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을 주는, 평범한 문장들
고래는, 상처가 나면 피가 멈추지 않는대. 작살을 맞으면, 워낙 커서 바로 죽진 않는다 해도, 계속 계속 피를 흘리면서 다니다가 나중에 죽는대. 이 세상 고래들은 전부 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병에 걸렸대. P.159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우리는 누구나 심장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 창살에 찔린 고래가 될 수 있다.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바다를 떠도는 고래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다가 조용히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채, 얕은 상처에도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그 착각과 상처를 입은 문제를 걷어내고 나면 대부분의 고통은 힘들지만, 결국은 지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착각은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지각’과 ‘인지’의 오류다. 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실제와 다른 것을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감각과 기억, 상상과 감정이 엉켜 만들어낸 왜곡된 현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사실이라 여기고, 그 믿음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 착각은 그렇게 시작된다.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믿고 있는 현실을 의심하고, 감정과 거리를 두는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감정의 언어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고, 그러므로 가능하다.
만약 그것조차 불가능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고통 속에 갇혀 지혈되지 않는 상처로 숨이 끊겼을 것이다. 사랑이나 믿음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고, 그 후유증은 오래간다. 그런 면에서 보면, 믿음과 사랑은 늘 의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쁜 꽃을 보며 그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벌레를 상상해 얼굴을 찡그리는 건, 너무도 불행한 일이다. 나 역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소중하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도움을 주었고, 그 도움으로 건넨 돈을 언젠가는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의 약속을 믿었다. 그 돈은 받지 못했고, 그와는 연락이 끊겼다. 내 삶에는 깊은 금이 갔다. 그 일로 인해서 이후 몇 년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지옥 같았다.
처음엔 미친 사람처럼 아무 데나 화를 냈다. 상처는 그럴수록 더 깊어지고, 곪았다가 터지고, 다시 곪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일과 무너진 생활을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만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주셨다. “괜찮다. 괜찮다. 고생했다.” 그 말이, 그 장면이, 무너진 나를 붙잡아주었다.
나는 그 꿈에 매달렸다. 그 꿈이 아니었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붙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뇌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뇌에서 선택한 믿음이 나를 무너뜨렸고, 동시에 다시 살게 만들었다. 처음과는 반대로, 나는 이제 내가 잘 살아낼 수 있다는 작은 마음 하나를 붙들게 되었다. 그 마음이 희망이 되었고, 희망은 다시 나를 일으켰다.
작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떠도는 고래도, 얼마간은 살아남는다. 고래는 회복력이 강한 동물이다. 세포 재생 능력도 뛰어나고, 그 시간 동안 구조대라도 만난다면 살아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정신은 고래만큼이나 강하다. 착각과 진실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희망’은, 마음과 진실이 혼란스러울 때, 아주 낮은 보폭으로 조용히 다가온다. 그 희망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다만 작은 틈이 나기를 기다린다. 그 틈 하나만 허락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더 단단하게, 더 유연하게, 더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