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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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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 Jun 27. 2021

산후우울증에 관한 이야기

엄마는 산후우울증 이해가 안가. 어떻게 내속으로 낳은 예쁜 아가를 보고 우울해질 수가 있지?

대학교 때 자신의 엄마가 했던 말이라며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그때는 우리 엄마도 같은 말을 했을 것 같아 공감했다. 


출산 후 산후우울증은 100% 온다고 한다. 다만 사람에 따라 가볍게 지나가기도 심각하게 겪기도 할 뿐. 난 아이를 둘 낳으며 산후우울증을 겪지 않았다. 가끔 우울감이 들긴 했지만 그런 마음으로 무기력해지거나 아이가 보기 싫어 지거나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마 가볍게 지나갔나 보다. 하지만 순간순간 '아 이래서 산후우울증이 오는 거구나'라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답게 그럴 때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생각하곤 했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모유수유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속상하고 짜증나 방에서 펑펑 울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아이는 수유할 때마다 울고불고 발버둥 치는데,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 와중에 또 수유콜이 와서 아이를 받아 수유실로 갔는데 맞은편 산모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 엄마도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우리는 왜 울었을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엄마상'은 나의 엄마다. 자신의 삶보다는 아이를 위한 삶을 사는 엄마. 난 그런 엄마 밑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아이로 자랐다. 그런데 출산 후 이 부분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났다. 우리 엄마 세대의 여성은 성인이 된 후 적당히 사회생활을 하다 결혼과 동시에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다르다. 어려서부터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하게 교육받았고, 취업의 기회가 주어 졌으며 사회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며 결혼 후에도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다 출산과 함께 모든 것이 박탈되어 고립된 것이다. 출산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최소 몇 개월은 자신의 몸을 위해서라도 잠시 멈춰야 한다. 이 변화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정되어 있는 출산이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더라도 처음 겪는 출산 이후 상황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이상적인 엄마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나의 자아가 충돌해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정말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변한 세상 속에 조선시대와 크게 변화된 것이 없는 출산 후 나의 상황에서 오는 괴리감은 카오스 그 자체다.


신생아와 함께 하는 삶이란 지옥이다. 행복한 지옥이 아니라 그냥 지옥. 우선 출산 후 몸은 만신창이다. 만삭의 배를 지탱하며 벌어졌던 골반과 위축되어 있던 장기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고 한껏 늘어났던 자궁도 열심히 수축 중이다. 이렇게 나의 몸은 정상인의 몸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느라 많이 피곤한 상태지만 아이를 돌보며 모든 기본생활권이 박탈당한다. 식사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은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아이가 엄마와 잠시 떨어져도 괜찮은 시간에 맞춰야 한다. 신생아는 2~3시간에 한 번씩 수유해야 하기 때문에 1회 수면시간은 2시간을, 하루 총 수면시간은 5시간을 넘기기 어렵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어지는 법. 마음도 같이 지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가장 절정은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난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힘들고 부당하면 포기하거나 외면하며 잠시 쉬기도 했다. 육아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아이는 불편해 쉴 새 없이 운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신의 상태를 말로 표현하기까지는 꾀 오랜 시간이 걸리니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까지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산후우울증, 육아우울증의 장애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죄책감'이다. 야속하게도 아이들은 엄마의 우울을 금세 알아차린다. 혹은 엄마의 마음과 상관없이 생존을 위해 요구하고 또 요구한다. 엄마가 세상에 전부인 아이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더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정신을 잡고 있기란 어렵지 않을까? 엄마라고 해서 나와 나와는 다른 존재인 아이를 함께 지켜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변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예전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에게 더 집중하며 잘 해내고 있는 나를 매우 칭찬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독였다. 물론 내가 마음 돌보는 일이 능한 편이라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육아를 하는 엄마, 아빠, 출산을 앞둔 예비맘 모두가 스스로 많은 칭찬을 해주기 바란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우울은 별개이니 부디 자신의 우울한 마음에 죄책감까지 더하질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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