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첫 번째 고개,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
살면서 종종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평정심'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누군가에게는 제가 너무 쉽게,
모든 상황에서 평정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삶에서 그 어떤 것도,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 듯합니다.
40중반을 넘긴 저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지금 제가 유지할 수 있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의 평정을 갖기까지
삶의 큰 고개를 몇 개 넘어온 것 같습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힘들었고, 가장 무너져내렸던 첫 번째 고개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20대 초반의 일이었습니다.
제 글이나, 강연을 통해 들으셨던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의 꿈은 동시통역사였습니다.
대학 4년 내내 통역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저희집은 해외 연수, 해외 여행, 문화적인 혜택 등을
제법 누리는, 크게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던 저희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건
아버지께서 두 번째로 암이 재발했을 시점이었습니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보니
당시에는 치료비만 해도 어마어마했고
보험이 커버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대학교 4학년 2학기, 저는 급히 취업으로 노선을 선회해야 했습니다.
급히 토익 점수를 만들고,
취업을 준비하며 힘겹게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짧은 준비에도 불구하고
저를 받아주는 어딘가가 있었다는 점이지요.
대학교 졸업식에는 아버지께서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미 몸이 쇠할 대로 쇠하셨던 상태였으나
사실 병원에서는 문제가 없다, 계속 치료를 하면 된다는 상황이었고
지금의 의술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3월, 어느 날처럼 아버지를 위해
흰죽을 쑤어놓고 회사에 다녀왔는데
아버지 상태가 영 이상했습니다.
급히 응급실로 모시고 갔는데 응급실 의사가 저를 따로 불러
길어야 4개월 남았다는 선포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급히 병원에 입원을 하시고
4개월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가게 되셨지요.
당시 정말 후회가 되는 것은 4개월 남았다는 이야기를
조금 더 다정하고, 따뜻하고, 힘을 실어주면서 전달했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워 너무 생각 없이
중한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후회가 늘 남습니다...
중환자실은 오전 10시, 저녁 7시 단 두 번만 30분간 면회가 가능했습니다.
다니던 회사 부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저는 6시 반에 칼퇴근을 했지요.
그래야만 7시에 겨우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를 30분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 팀장님과 친한 동생을 제외하고는 저의 사정을 몰랐기에
신입사원이 칼퇴근을 한다고 앞에서 뒤에서 참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업무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서
저는 늘 6시에 출근해서 저녁에 못다한 일을 챙겼지요.
그런 생활이 몇 달 반복되었고,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빠가 정신이 없으셔서 말 한 마디 못해본 적도 있었고,
어느 날은 상태가 악화되어 목에 호스를 연결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하실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응급실 의사가 선포했던 4개월 뒤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암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하지요.
아버지는 IMF를 겪으며 당시 다니시던 회사에 임원으로 계셨는데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정리해고 하면서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였는지, 임원이셨던 아버지와 다른 임원 한 분께서
대표이사 대신 그 책임을 끌어안으며
저희 집을 담보로 회사를 살려보려 애썼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집안 구석구석에 빨간 딱지가 붙고
모든 상속을 포기해야만 했던 힘겨운 시간들이 더해졌습니다.
제 삶의 큰 기둥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상실과 더불어
경제적인 상실까지 더해진 저의 20대 초반은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당시 제 자신의 상실에 빠져 있다 보니,
아직 대학 졸업도 못하고 군대도 가지 않았던 동생은 어떠했을지,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당시의 제가 참 야속하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남매간의 우애는 지금까지도 무척 좋아서
일주일에 서너번은 통화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입니다.
어쩌면 그런 상실의 시기가 있었기에
더욱 돈독해진 관계가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그 시기에 저는 방황도 했고 반항도 했고
정처없이 흘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에서 나를 잃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남겨주셨던 삶의 교훈과 지혜 덕분이었지요.
상실의 시기에 가장 좋았던 점은,
나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상실의 몇 년 덕분에, 커리어와 가정에 대해
남보다 한 발 앞서 고민하면서 내 삶의 방향성을 잡아가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상번역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던
결단력도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의 첫 번째 고개를 잘 넘어선 저는
한층 더 단단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살면서 어떤 상황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도 깨달았지요.
건강에 더욱 신경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렇게 삶에서 상실이란 늘 마이너스만 가져다주지는 않다는 것을
20대 초반, 꿈의 포기, 아버지, 경제적 상실까지
크나큰 상실을 연거푸 겪으면서 온몸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책이든, 글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고비를 이겨낸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저는 새로운 용기와 삶의 지혜,
그리고 내가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빛이 되어주길 바라며.
저의 첫 번째 인생의 고개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참,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첩에 적힌 마지막 일기는
'유진이가 쑤어준 흰죽이 참 맛있었다'였습니다.
그 수첩은 지금까지도 제 보물로 남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