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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오라 Apr 16. 2023

나를 설레게 하는 반바지

그 반바지 어딨어? 안 입자나 나한테 넘기라니깐   
아, 진짜! 입던 안 입던 내 거야. 왜 자꾸 넘기래     

   

빨래 후 다 마른 옷가지를 개어 서랍 속에 넣고 있었다. 등 뒤로 신랑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온 신랑의 말에 욱해져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화가 났다기보단 짜증이 났다고 해야 할까. 그 마음이 그대로 말속에 녹아내려 쏟아져 나왔다.          


계절 옷 정리를 하는 어느 날부터 신랑은 그 반바지의 존재를 물어왔다. 처음엔 ‘맞다! 그 반바지. 어차피 맞지도 않아 못 입는데 정리해야겠지?’ 서랍을 열 때마다 그 반바지에 눈길이 갔다. 빳빳한 재질에 짧았다 길었다를 반복하는 체크무늬 반바지를 보며 그때의 나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길이만큼 시원시원하고 당당했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enginakyurt, 출처 Unsplash



신랑과는 2년 정도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오가던 그 해 신랑이 옷을 사주겠다며 백화점에 데려갔다. 그 당시 나에게 백화점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회사 언니들 따라 아이쇼핑이나 할인행사 매장에 가기 위해 몇 번 가본 게 다였다. 내 쇼핑몰 리스트에 백화점은 없었는데 가도 되는 건가 싶었다.          


여성의류가 있는 층으로 올라가 한 바퀴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다시 볼 게 있다면서 나를 끌어당겼다. 신랑이 멈춰 선 곳은 어느 매장 입구에 있는 마네킹 앞이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어떠냐고 물어봤다. 신랑의 손 끝을 따라 가보니 짧은 반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입으라고?’ 속으론 당황스러웠다. 속마음을 숨긴 채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짧은 길이에 민망하긴 했지만 꽤 이쁜 반바지였다. 역시 신랑은 나보다 패션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렇게 짧은 길이의 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민망했다. ‘걸을 때나 앉을 때 속옷이 다 보이는 거 아냐?’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랑은 ‘괜찮은데? 이쁘다! 이거 사자’ 하며 말을 건넸다. 거울 속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나도 꽤 마음에 들었다. 주로 면으로 된 반바지를 입었기에 이런 재질과 디자인의 옷을 입은 적도 사본적이 없었다. 아마 나 혼자 갔더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옷이다.           


연애기간이었지만 결혼할 사이었다. 그런 사람이 골라준 짧은 길이의 트렌디한 바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 다시 한번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았다. ‘날씬하니 이런 바지도 입는 거야,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입어 보겠어’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옷을 갈아입으려 탈의실에 들어갔는데 문득 가격이 궁금했다. ‘헉! 아니 이 짧은 바지가 뭐 이리 비싸!’ 자세히 살펴보니 드라이클리닝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비싼 가격에 놀랐는데 입을 때마다 드라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탁비까지 걱정됐다. 복잡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신랑에게 다가갔다. ‘자기야! 이거 근데 너무 비싼데? 사도 되는 거야? 다른데 가볼까?’ 신랑도 백화점으로 쇼핑 다니는 사람이 아닌 걸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결혼하려면 돈도 많이 필요한데 벌써부터 과소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이쁘잖아, 잘 어울려, 이런 바지 없잖아, 한번 입어봐’ 신랑은 점원에게 결제를 부탁했다.   

  

그렇게 나의 옷장으로 들어오게 된 반바지. 한 번은 출근할 때 입고 갔던 적이 있다. 유니폼을 입는 회사였기에 입고 가볼 용기가 생겼다. 혹시나 직원들을 마주칠까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회사 입구로 걸어갔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오늘 패션이 남다르네~’ 등 뒤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친구가 사준 건데 잘 어울려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디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평소 나답지 않다고 느껴졌다. 회사에 입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나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리 유니폼을 입는다지만 출퇴근길 사람들의 시선 하며 회사에서의 눈들이 신경쓰였텐데 말이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도 이쁘다는 직원들 말에 기분은 좋았다. 회사 언니들도 진작 좀 입고 다니지 젊을 때 많이 입으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 말에 용기를 내 몇 번을 회사에 입고 갔었다. 신랑을 만날 때도 한동안 입고 다녔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해 겨울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임신을 했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내 체형은 변했다. 입고 싶어도 입을 수가 없었다. 설령 입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애 엄마가 바지 길이가 저게 뭐래’ 이런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내 서랍 속 그 반바지는 빛을 보지 못하고 몇 해가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결혼 17년 차라 반바지의 나이도 17년이 됐지만 아직도 새 옷 같다. 디자인이며 재질이 지금 입어도 괜찮은 옷이다. 그래서일까 신랑은 안 입는 것 같은데 맞는 사람 주는 게 낫지 않겠냐며 본인한테 달라고 했다. 아마도 사촌 동생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럴까?’ 미니멀 라이프가 좋다며 비우기를 실천하자 한동안 고민에 빠졌었다. ‘그래! 입지도 못하는데 좋은 주인 만나서 세상의 빛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수록 싫은 내 마음이 느껴졌다.           


미니멀 라이프라고 안 입고 불필요한 것을 다 버리는 건 아니다. 매번 고민은 됐지만 이 옷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로 아련한 무언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그 시절 내 젊음이, 나 답지 않다고 느꼈던 그 무엇이 아닐까.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또 그것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 말이다. 신랑이 결혼 전 백화점에 가서 큰 맘먹고 사준 것도 영향이 없을 순 없겠지. 어쩌면 지금도 그런 일탈의 모습을 꿈꾸는 건 아닐까.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의외의 모습이 보일 때의 그 짜릿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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