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 밥알을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명절마다 밥 대신 식혜 밥알을 한 그릇 가득 퍼먹을 정도다. 흐물흐물하고 연한 잿빛이 도는 것이 먹음직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 입맛에는 그렇게 잘 맞았다.
한 수저 가득 퍼서 꼭꼭 씹으면 이내 단물이 다 빠져나가고 종잇장을 씹는 듯 질겅거리는 잔해가 남는데 나는 그 식감도 좋아했다. 글로 적고 보니 별 희한한 걸 좋아했구나 싶어 가족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던 시선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식혜 밥알은 나에게 꽤 특별한 음식이다.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트리거다. 옛날 불량식품이나 엄마의 집밥과는 조금 다른, 예쁨과 용돈을 풍족하게 받아 행복했던 명절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할머니는 명절마다 밥알을 가득 넣은 식혜를 한솥 가득 만드셨다. 우리 집은 할머니부터 엄마까지 대대로 요리 솜씨가 부족하지만 각자의 비기가 있었다. 할머니에겐 비장의 식혜가, 엄마에게는 비장의 탕국과 떡볶이라는 비기가. 아무튼, 할머니는 커다란 곰솥에 끓인 식혜를 집에서 가장 시원한 곳에 두었다. 설이냐 추석이냐에 따라 그 곰솥의 위치는 마루가 되었다가 골방이 되었다가 했다.
할머니는 내가 가면 “나리가 좋아하는 식혜 항금 만들었다”고 하시며 국그릇 한가득 식혜 밥알을 담아 주시곤 했다. 밥을 먹듯 숟가락을 움켜쥐고 식혜를 퍼먹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웰빙 붐이 일어나 설탕이 건강을 위협하는 악마가 되고 난 뒤부터 내 주변의 식혜 맛집들이 점점 사라졌다. 이모도 외숙모도 모두 한마음으로 설탕을 반 이상 줄인 밍밍한 식혜를 만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웰빙을 몰랐다. 평생 글자를 모르셨기 때문에 티비 프로그램은 드라마만 보셨다. 그 덕에 나는 할머니 집에서만큼은 여전히 달고 맛있는 식혜를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시기 전까지 만들었던 식혜는 늘 당도와 밥알이 푸짐했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일이 넘쳐났던 20대 때는 몰랐다. 내가 명절마다 그 식혜 밥알을 그리워하게 될 줄 말이다.
대구 여자인 나는 서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시할아버지께서는 북한이 고향으로 6.25 사변 때 남한으로 건너오셨다고 했다. 멀디먼 거리만큼이나 각자 집안의 풍습은 천지 차이로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을 느꼈던 최초의 경험은 바로 명절이었다.
2월에 결혼한 나는 그해 10월에 유부녀로서 첫 명절을 맞이했다. 시댁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긴장되고 초조했다. 정작 그날 무슨 일을 했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눈치 본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어색했었고 지금도 어색하지만, 그 때문에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툭 까놓고 말하자면, 불편하고 긴장돼서 내 처지 같은 건 떠올릴 틈도 없었다.
아무튼, 시댁의 방식대로 차려진 명절 제사상은 낯선 것들이 많았다. 문어도 돔배기도 없는 제사상은 빈틈없이 채워졌음에도 허전해 보였다. 통째로 상에 올라간 삶은 닭이 신기해 계속 눈길이 갔고, 제사를 치르는 방식도 달라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익숙한 것도 있었으나 맛이 달랐다. 특히 탕국은 들어간 재료는 비슷한 것 같은데 엄마의 것과는 맛이 많이 달라 지금도 먹을 때마다 신기하다.
그래. 나의 첫 명절은 대체로 어색했고 대부분 신기했다. 냉장고에 가지런히 놓인 식혜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어머니도 식혜를 직접 만드셨다. 명절 전에 미리 끓여둔 식혜는 500ml짜리 생수병에 담겨 냉동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당연히 어머님의 식혜는 내가 어릴 적 먹던 것보다 훨씬 덜 달았다. 그리고 밥알이 거의 들어있지 않았다. 시댁에는 식혜 밥알을 먹는 사람이 없어서 맑은 물만 따로 따라내어 냉장고에 넣어두신다 했다.
건더기가 거의 없어 말갛기만 한 식혜 병을 보며 나는 갑작스레 여러 감정에 휩싸였다. 어색함, 불편함, 그리움, 억울함, 울적함, 서러움 등.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내가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나의 식혜 기호 따위 시댁 가족들이 알 리가 없는데, 밥알 하나 없는 식혜가 왜 그렇게 야속해 보이던지.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허전함이 밀려들어 순식간에 울적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식혜를 보고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어 울컥 솟았던 감정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지금도 말간 식혜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 강렬한 서운함과 울적함은 어디서 왔을까? 한참 고민한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느꼈던 외로움은 ‘내 처지’를 체감하면서 들이친 거구나. 처지라고 표현하니 퍽 처량 맞고 부정적인 느낌이 강해 조금 과한가 싶지만 이외에 더 잘 어울리는 단어를 고르지 못했다.
할머니 집에서 보낸 명절은 그저 내 세상이었다. 가족이 모두 경북 토박이지만 나는 하나뿐인 손녀라는 지위 덕에 흔한 남녀차별도 거의 겪지 않고 자랐다. 기껏해야 슈퍼로 종종대며 심부름 다니는 게 가장 큰 일이었던 내가 가부장적인 시댁에 적응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내 앞으로 척척 나오던 것은 이제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는 걸 깨닫자 왜 그렇게 엄마가 ‘시집 늦게 가라. 안 가도 된다.’를 외쳤는지 알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고작 식혜 하나로 예쁨만 잔뜩 받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걸 체감했다. 낯설고 어색한 환경 속에서 완전한 타인과 새로운 인생을 꾸려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걸, 그 500ml 생수병에 담긴 식혜가 일깨웠다.
나중에 어머님께서 내 식성을 알고서 머그컵에 식혜 밥알을 담아 주신 적이 있었다. 감사한 마음과는 별개로 머그컵에 티스푼으로 밥알을 떠먹으며 ‘이거 말고 국그릇에 담아서 큰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할머니가 식혜를 만들지 않게 되고부터 식혜 밥알을 푹푹 떠먹어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다만 이젠 내가 직접 만들지 않는 한 그렇게 먹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조금 허전하게 다가올 뿐이다. 아마도 내가 더 나이를 먹어 과거의 무언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날이 오면 곰솥 가득히 식혜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