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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의 두 얼굴: 양조용 포도와 식용 포도의 비밀

by 보나스토리

포도의 분류, 양조용 포도와 식용 포도

마트 과일 코너에서 보는 포도와 와인 한 잔에 담긴 포도는 같은 과일일까?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양조용 포도와 식용 포도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재배되고 선별된 품종들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면 와인을 마실 때나 포도를 고를 때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포도의 기본 분류

포도는 크게 학명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재배되는 포도는 유럽종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다. 이 종은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해 온 포도로, 전 세계 와인의 대부분이 이 종에서 만들어진다.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피노 누아, 리슬링 같은 유명한 와인 포도 품종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외에도 북미 원산의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가 있는데, 콩코드 포도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얼리도 라브루스카 계통이 섞인 품종이다. 또한 비티스 아무렌시스(Vitis amurensis)는 동북아시아가 원산지로 내한성이 강한 야생 포도 종이다.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1).png Vitis vinifera

와인의 색은 어디서 올까?

와인을 마시다 보면 궁금해진다. 레드 와인의 아름다운 붉은색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답은 바로 포도 껍질에 있다. 레드 와인의 붉은색은 레드 포도 품종의 껍질에서 우러나온 붉은 색소, 안토시아닌 때문이다. 레드 와인을 만들 때는 포도를 으깬 후 껍질, 씨앗과 함께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껍질의 안토시아닌이 포도즙으로 녹아들면서 와인은 루비빛, 자줏빛, 석류빛으로 물든다.

반면 화이트 와인은 화이트 포도 품종과 레드 포도 품종 모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밀은 제조 방식에 있다.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때는 껍질을 제거하고 포도즙만으로 발효시킨다. 레드 포도라도 과육 자체는 대부분 무색이나 연한 녹색이기 때문에, 껍질을 빨리 분리하면 투명한 화이트 와인이 된다. 실제로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은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같은 레드 포도 품종으로도 만들어진다.

로제 와인은 그 중간 지점에 있다. 레드 포도로 만들되 껍질과 함께 발효하는 시간을 짧게 해서 연한 분홍빛을 얻는다. 색의 농도는 껍질과 접촉한 시간에 비례한다.


양조용 포도의 특징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우리가 식탁에서 먹는 포도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크기다. 양조용 포도는 알이 작고 단단하다. 일반적으로 식용 포도의 절반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작은 알 안에 풍부한 맛과 향이 농축되어 있어 복잡하고 깊은 풍미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껍질도 두껍고 질긴 편이다. 껍질에는 앞서 말한 안토시아닌뿐만 아니라 타닌, 폴리페놀 같은 중요한 화합물이 들어 있어 와인의 색상, 구조감, 숙성 잠재력을 결정한다. 두꺼운 껍질은 와인에 복잡미와 깊이를 더해준다.

당도와 산도의 균형도 중요하다. 양조용 포도는 당도가 높으면서도 적절한 산도를 유지해야 한다. 당분은 발효 과정에서 알코올로 전환되므로 와인의 도수를 결정하고, 산도는 와인의 신선함과 균형감을 만든다. 기후와 토양, 수확 시기에 따라 이 균형이 달라지며, 와인 메이커는 최적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세심하게 당도와 산도를 측정한다.

씨앗의 비율도 높다. 양조용 포도는 과육 대비 씨앗의 비율이 크다. 씨앗에도 타닌이 들어 있어 와인의 구조에 영향을 준다. 반면 식용 포도는 씨 없는 품종이 선호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표적인 양조용 포도 품종으로는 레드 와인용으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피노 누아, 시라, 말벡 등이 있고, 화이트 와인용으로는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리슬링, 피노 그리지오 등이 있다. 각 품종은 고유의 향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재배되는 테루아(terroir, 토양과 기후 등 재배 환경)에 따라 다른 개성을 표현한다.

제목을 입력해주세요..png Shine Muscat

식용 포도의 특징

식탁에 오르는 포도는 신선하게 먹기 좋도록 개량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포도 알 크기다. 입에 물었을 때 과즙이 풍부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껍질은 얇고 부드러워 껍질째 먹기 편하며, 씨가 없는 품종들이 인기가 많다.

식용 포도는 당도가 매우 높고 산도는 낮은 편이다. 상큼함보다는 달콤함이 강조되어 디저트처럼 즐길 수 있다. 또한 알이 송이에 촘촘하게 붙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고 먹기에도 편리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용 포도로는 샤인머스캣, 캠벨얼리, 거봉, 델라웨어 등이 있다. 특히 샤인머스캣은 K-Grape의 대표 포도 품종으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에서 1988년 교배를 시작해 2006년 품종 등록된 이 포도는 우리나라에 도입된 후 재배 기술이 발전하면서 한국산 샤인머스캣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고, 이제는 수출까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샤인머스캣의 특징으로는 먼저 씨가 없어 껍질째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있다. 껍질이 매우 얇아 씹는 식감이 부드럽고, 특유의 머스캣 향이 풍부해 마치 향수를 맡는 듯한 우아한 향미를 선사한다. 당도는 평균 17-22 브릭스로 매우 높으면서도 산도가 적절해 단순히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깔끔한 뒷맛을 준다. 한국포도회는 권장 출하 당도를 18 브릭스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알이 크고 과육이 단단해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며, 저장성도 좋아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연두색에서 익어가는 외관도 고급스러워 프리미엄 과일로 자리매김했다.

해외에서는 톰슨 시들리스(Thompson Seedless), 레드 글로브(Red Globe), 크림슨 시들리스(Crimson Seedless) 같은 품종들이 널리 재배되고 판매된다. 이들은 모두 씨가 없고 크기가 크며 저장성이 좋아 전 세계로 수출되기에 적합하다.


재배 방식의 차이

양조용 포도와 식용 포도는 재배 방식도 다르다. 양조용 포도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란다. 물을 제한하고 척박한 토양에서 재배하면 포도나무는 생존을 위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이 과정에서 토양의 미네랄을 흡수해 복잡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포도나무가 최고의 와인을 만든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수확량도 의도적으로 제한한다. 한 그루에서 생산되는 포도 알의 개수를 줄여 각 알에 양분이 집중되도록 한다. 프랑스 일부 프리미엄 와인 산지에서는 한 그루에서 와인 한 병도 안 되는 양의 포도를 수확하기도 한다. 피노 누아나 카베르네 소비뇽 등 포도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750ml 와인 1병을 만드는 데는 약 1kg의 포도가 필요하다.

반면 식용 포도는 풍부한 관개와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된다. 크고 탐스러운 알을 얻기 위해 충분한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며, 수확량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일반적인 식용포도의 생산량은 포도나무 한 그루당 10kg~25kg 안팎까지 나올 수 있으며, 포도송이 수와 무게는 품종, 수령, 재배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병충해로부터 보호하고 외관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샤인머스캣의 경우 송이를 다듬는 작업을 통해 알의 크기를 균일하게 키우고, 봉지를 씌워 병충해와 일조량을 조절하는 등 정성스러운 관리가 필요하다.


왜 양조용 포도를 먹지 않을까?

양조용 포도를 직접 먹어본 사람은 드물다. 와인 양조장을 방문하면 가끔 시식할 기회가 있는데, 대부분 실망한다. 알이 너무 작아 먹을 게 별로 없고, 껍질은 질겨서 씹기 힘들며, 씨앗도 크고 많다. 당도는 높지만 산도도 강해 날것으로 먹기엔 균형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양조용 포도는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진가를 발휘하도록 설계되었다. 발효와 숙성을 거치며 포도가 가진 잠재력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날것으로 먹기엔 부족하지만, 와인이 되면 수백 가지 향미가 피어나는 마법 같은 변신이 일어난다.


교차점: 겸용 품종과 예외

물론 예외도 있다. 일부 품종은 양조용과 식용을 겸한다.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식탁에서 먹던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양조용 포도를 생으로 즐기는 문화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품종 개량 기술이 발전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각자의 목적에 최적화된 품종을 사용하는 것이 여전히 주류다.


같은 포도라는 과일이지만 양조용과 식용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발효 음료를 만들기 위해, 다른 하나는 신선한 과일로 즐기기 위해 선택되고 개량되었다. 작고 질긴 양조용 포도 알 하나하나에는 토양과 기후, 양조가의 철학이 담겨 있고, 크고 달콤한 식용 포도에는 먹는 즐거움을 극대화하려는 재배자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같은 듯 다른 두 세계, 이것이 바로 포도의 매력이다.


� 이 글은 조동천 저 『또 한 잔의 와인, 또 한편의 이야기』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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