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상으로 시작되는 와인의 취향

색이 바꾼 와인 문화

by 보나스토리

와인의 의미가 바뀐다, "눈으로 마신다"

와인잔을 기울이기 전, 우리는 이미 그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다. 레이블의 디자인, 병의 형태, 액체가 빛을 머금은 색깔. 와인을 음미한다는 것은 더 이상 미각과 후각만의 영역이 아니다. 21세기의 와인 문화는 시각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고, 그 발견은 와인의 의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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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가 바꾼 와인 풍경

2010년대 중반, 소셜 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와인 산업에도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한 시각 중심 플랫폼은 와인을 '마시는 음료'에서 '보여주는 오브제'로 탈바꿈시켰다. 프로방스 로제의 연한 핑크빛 액체가 담긴 사진이 수십만 개의 좋아요를 받고, 와이너리의 황금빛 석양 아래 포도밭 풍경이 바이럴 콘텐츠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이런 변화를 주도했다. 이들에게 와인은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어떤 와인을 마시느냐가 곧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시대. 그래서 와인 생산자들도 변화했다. 레이블 디자인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와이너리 공간을 만들며, 병의 형태와 색깔까지 신경 쓰기 시작했다.


레이블이라는 새로운 캔버스

과거의 와인 레이블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였다. 포도 품종, 빈티지, 생산 지역, 알코올 도수. 전통적인 와인 애호가들은 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며 와인의 품질을 가늠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레이블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샤토 무통 로칠드다. 1945년부터 매년 유명 아티스트를 선정해 작업을 의뢰하는 이 전통은 와인과 예술의 만남을 상징한다. 피카소, 달리, 샤갈, 그리고 최근에는 올라퍼 엘리아슨처럼 동시대 대표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손으로 직접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한다. 매 빈티지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와인 애호가들은 그 레이블을 수집한다. 호주의 젊은 와인메이커들은 네온 컬러와 팝아트 스타일로 기존의 와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었다. 크로아티아의 한 디자인 스튜디오는 비오디나미 와인의 생태친화적 재배 방식을 미적으로 표현한 레이블로 국제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레이블은 이제 와인이 담고 있는 철학과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압축해서 전달하는 매개체다. 때로는 맛보다 레이블이 구매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gdfh.jpeg The color of wine

색깔이 불러일으키는 기대

와인의 색은 항상 중요했다. 전문가들은 색의 투명도, 깊이, 뉘앙스를 통해 와인을 평가한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 색이 주는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감정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신호다.

로제 와인의 재발견이 이를 증명한다. 한때 진지한 와인 애호가들에게 외면받던 로제는 그 아름다운 핑크빛 덕분에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 프로방스는 생산량의 거의 90%가 로제 와인 특화 지역으로, 연평균 1억 5천만 병 안팎을 생산하며 전 세계 로제 와인의 약 5%를 공급한다. 프로방스 로제의 옅은 연어색은 여름휴가, 지중해의 햇살, 여유로운 오후를 연상시킨다.

오렌지 와인도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화이트 와인 포도를 레드 와인처럼 껍질과 함께 발효해 만드는 이 와인은 그 독특한 호박색 때문에 주목받았다. 내추럴 와인 열풍과 함께 최근 몇 년간 오렌지 와인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맛의 복잡성과 무관하게, 그 색깔 자체가 '다른', '특별한', '자연적인' 무언가를 약속한다. SNS에서 오렌지 와인의 사진은 강한 시각적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공간으로 번진 시각적 연출

와인을 눈으로 마신다는 것은 와인 자체를 넘어 와인이 놓인 맥락 전체를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의 와이너리들은 건축과 인테리어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방문객들이 와인을 마시는 순간뿐 아니라 그 공간 전체를 사진으로 남기고 공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파 밸리의 유명 와이너리들은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빙해 포도밭을 조망하는 미니멀한 테이스팅룸을 지었다.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포도밭과 산맥,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와인잔. 이 조합은 완벽한 인스타그램 순간을 만들어낸다. 스페인의 한 와이너리는 지하 셀러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에서 와인을 시음할 수 있게 했다.

와인바와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와인을 서빙하는 방식, 조명, 테이블 세팅까지 모든 것이 시각적 경험을 고려해 기획된다. 어두운 조명 아래 촛불과 함께 놓인 와인잔, 대리석 테이블 위에 정렬된 여러 잔의 와인, 벽면 가득한 와인 셀러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 이 모든 이미지는 와인을 마시는 행위를 하나의 미학적 경험으로 승화시킨다.

7.jpeg The taste and sight of wine

맛과 시각, 그 사이의 진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와인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와인은 결국 마시는 것이고, 그 진정한 가치는 맛과 향에서 나온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흥미롭게도 과학 연구들은 시각이 실제로 미각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와인이라도 어떤 잔에 담기느냐, 어떤 공간에서 마시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의 뇌는 시각 정보를 미각 정보와 통합해 하나의 총체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와인을 눈으로 마신다는 것은 와인 경험의 자연스러운 확장일 수도 있다.


새로운 와인 문화의 탄생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시각적 요소가 와인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현대의 와인 문화는 더 풍부하고 다층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복잡한 테이스팅 노트를 읽지 못해도, 포도 품종을 모두 외우지 못해도, 아름다운 레이블과 색깔을 통해 와인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시각은 와인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낮추는 다리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것은 와인 생산자들에게 새로운 창의성을 요구한다.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와인이 어떻게 보이고, 어떤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와인메이킹은 이제 농업과 과학을 넘어 디자인과 예술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 잔의 와인 앞에 앉는다. 레이블의 디자인을 감상하고, 잔에 부어진 와인의 색을 들여다본다. 빛이 액체를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그러데이션을 관찰한다. 이 모든 순간은 와인을 마시는 경험의 일부다. 이 시각적 여정이 우리의 기대를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곧 경험하게 될 맛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와인의 의미는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와인을 입으로 마시지만, 동시에 눈으로도 마신다. 그리고 그 두 경험은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얽혀 있다. 이것이 21세기 와인 문화의 진짜 혁명이다. 와인은 더 이상 단순히 맛보는 음료가 아니라, 보고, 느끼고, 공유하고, 기억하는 총체적 경험이 되었다.



� 참고 서적 《와인, 이야기로 피어나다》 조동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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