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시지 않고 맛을 짐작하는 방법
보는 순간 시작되는 와인의 이야기
와인을 마시기 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와인을 보는 것이다. 잔을 약간 기울여 하얀 종이나 테이블 위에서 색을 관찰한다. 이 짧은 순간, 전문가들은 와인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읽어낸다. 포도 품종, 숙성 기간, 기후, 양조 방법까지. 색만 봐도 이 모든 걸 알 수 있다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와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색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와인의 색을 제대로 보려면
와인 색을 정확히 보려면 방법이 있다. 투명한 와인 글라스에 1/4 정도 따른다. 흰 종이나 하얀 테이블 위에 잔을 놓는다. 45도 정도 기울인다. 그러면 와인의 색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진다. 가운데가 가장 진하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옅어진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봐야 한다. 어두운 레스토랑에서는 정확히 볼 수 없다. 캔들라이트는 낭만적이지만 와인 색을 왜곡한다. 자연광이 가장 좋다. 낮에 창가에서 보는 게 이상적이다.
색을 볼 때는 세 가지를 본다. 첫째, 주 색상. 둘째, 가장자리 색상. 셋째, 투명도. 이 세 가지가 와인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색으로 드러나는 레드 와인의 시간
젊은 레드 와인은 보라색을 띤다. 보졸레 누보가 대표적이다. 그 해 수확한 포도로 바로 만들어 출시하는 와인. 보랏빛이 감돈다. 포도 본연의 색이다. 안토시아닌 색소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이런 와인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가볍다.
시간이 지나면 색이 변한다. 보라색이 사라지고 루비색이 된다. 순수한 빨간색. 이 단계의 와인은 적당히 숙성됐다. 과일향도 있고 복합미도 생겼다. 대부분의 레드 와인이 이 색을 띤다.
더 숙성되면 오렌지색으로 변한다. 가넷색, 벽돌색, 주황빛. 안토시아닌이 변형되면서 더 밝은 색으로 바뀐다. 이런 와인은 오래된 것이다. 10년, 20년 숙성된 와인. 싱싱한 과일향은 줄었지만 다른 복합적인 향이 나타난다. 가죽, 담배, 흙냄새.
숙성이 너무 오래되면 갈색이 된다. 이미 절정기를 지난 것이다. 마셔도 되지만 최상의 상태는 아니다. 산화가 많이 진행됐다는 신호다.
화이트 와인은 반대로 간다
화이트 와인은 반대다. 시간이 지나면 색이 진해진다. 젊은 화이트 와인은 연한 노란색이다. 서늘한 산지의 와인은 특히 연하다. 약간 녹색 빛이 도는 레몬색. 이런 와인은 가볍고 상쾌하다. 산미가 살아있다.
숙성되면 황금색으로 변한다. 연한 황금색에서 진한 황금색으로. 오크통 숙성을 거친 와인은 더 진하다. 따뜻한 기후에서 생산된 와인도 처음부터 색이 진하다. 이런 와인은 바디감이 있고 풍부하다.
오래 숙성된 화이트 와인은 호박색이 된다. 심지어 갈색에 가까워진다. 디저트 와인이나 특별한 화이트 와인을 제외하면, 갈색이 느껴지는 화이트 와인은 절정기를 지났다고 보면 된다.
쏘떼른의 귀부 와인, 독일의 아이스바인 같은 스위트 와인은 예외다. 처음부터 진한 황금색이다. 이런 와인은 오래 숙성할수록 더 깊은 색을 띤다. 하지만 일반 드라이 화이트 와인이 갈색을 띤다면 주의가 필요하다.
진한 색이 말해주는 것
색이 진한지 연한지도 중요하다. 잔을 기울여 봤을 때 글자가 보이는가? 화이트 와인은 대부분 글자가 보인다. 투명하다. 하지만 레드 와인은 다르다. 진한 레드 와인은 글자가 안 보인다. 거의 불투명하다.
색이 진한 와인은 구조가 강하다. 타닌이 많다. 바디감이 있다. 오래 숙성할 잠재력이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말벡 같은 품종이 진한 색을 띤다. 이런 와인은 포도 껍질이 두껍다. 껍질과 즙을 오래 접촉시켰다. 침용 과정이 길었다.
색이 연한 와인은 가볍다. 타닌이 적다. 바디감이 약하다. 빨리 마셔야 한다. 피노 누아, 가메 같은 품종이 연한 색을 띤다. 이런 와인은 껍질이 얇다. 침용 시간이 짧았다.
하지만 색이 연하다고 나쁜 건 아니다.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다. 가벼운 와인은 음식과 잘 어울린다.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여름에 마시기 좋다.
가장자리에 비밀이 있다
잔을 기울였을 때 색의 변화를 본다. 가운데는 진하고 가장자리는 연하다. 이 스펙트럼이 넓을수록 숙성이 잘 된 와인이다. 색의 그러데이션이 다양하다. 가운데 검붉은 색, 중간 루비색, 가장자리 오렌지색. 이런 와인은 복합미가 있다.
스펙트럼이 거의 없는 와인도 있다. 가운데부터 가장자리까지 같은 색이다. 단조롭다. 이런 와인은 젊다. 아직 숙성이 덜 됐다. 맛도 단순할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맛만 강하다.
전문가들은 이 스펙트럼을 보고 와인의 상태를 판단한다.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변했다면? 숙성이 많이 진행됐다. 곧 마셔야 한다. 가장자리가 여전히 보라색이라면? 아직 젊다. 더 숙성시킬 수 있다.
로제는 빨리 마셔야 한다
로제 와인은 섬세하다. 연한 핑크색부터 연어살색, 장미색까지. 색의 범위가 넓다. 로제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세녜 방법으로 만든 로제는 색이 진하다. 포도 껍질과 즙을 접촉시키는 시간이 길다. 프로방스 로제는 색이 연하다. 껍질을 빨리 분리한다. 거의 핑크색에 가깝다.
로제 와인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오렌지색으로 변한다. 심지어 갈색이 된다. 로제는 빨리 마셔야 한다. 대부분 출시 후 1-2년 안에. 색이 변하면 신선함을 잃는다.
포도 품종과 껍질의 두께도 보인다
와인 색을 보면 포도 품종까지 짐작할 수 있다. 포도 껍질의 두께가 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두꺼운 품종은 색이 진하다. 껍질이 얇은 품종은 색이 연하다. 이건 법칙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껍질이 두껍다. 그래서 색이 아주 진하다. 검붉은 색, 거의 불투명하다. 잔을 기울여도 글자가 잘 안 보인다. 타닌도 많고 바디감도 묵직하다. 장기 숙성 잠재력이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보면 그 진한 색만으로도 "강한 와인이구나"라고 알 수 있다.
반대편에는 피노 누아가 있다. 껍질이 아주 얇다. 그래서 색이 연하다. 밝은 체리색, 루비색. 투명하다. 잔 뒤로 손을 대면 보인다. 타닌이 적고 부드럽다. 섬세하다.
메를로는 중간이다. 카베르네 소비뇽보다는 껍질이 얇지만 피노 누아보다는 두껍다. 색도 중간이다. 진하지만 투명도는 있다. 타닌도 적당하다. 부드럽지만 구조감도 있다. 그래서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블렌딩 하는 데 자주 쓰인다. 카베르네의 거친 타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시라(쉬라즈)도 껍질이 두껍다. 색이 매우 진하다. 카베르네 소비뇽만큼이나 불투명하다. 타닌도 풍부하다. 하지만 카베르네보다는 둥글둥글하다. 검은 과실과 후추 향이 특징이다.
가메(보졸레 품종)는 껍질이 아주 얇다. 색이 연하다. 보랏빛이 도는 밝은 빨강. 투명하다. 타닌이 거의 없다. 가볍다. 그래서 차갑게 해서 마신다. 보졸레 누보가 그렇게 밝은 색을 띠는 이유가 바로 가메의 얇은 껍질 때문이다.
기후도 색에 담긴다
와인 색으로 어느 나라 와인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따뜻한 기후의 와인은 색이 진하다. 포도가 완전히 익는다. 당도가 높다. 껍질이 두껍다. 호주, 칠레, 캘리포니아 와인이 이렇다.
서늘한 기후의 와인은 색이 연하다. 포도가 천천히 익는다. 산미가 살아있다. 껍질이 얇다. 부르고뉴, 독일, 오리건 와인이 이렇다.
물론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예외도 많다. 하지만 대략적인 경향은 있다. 색만 봐도 "이건 따뜻한 곳 와인이구나"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맑은지 흐린지도 중요하다
와인 잔을 빛에 비춰보면 투명도를 확인할 수 있다. 맑은지 흐린지는 와인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대부분의 와인은 맑다. 빛이 잘 통과하고 잔 뒤편의 글자도 또렷하게 보인다. 이런 와인은 제대로 양조되고 잘 보관된 것이다.
간혹 흐린 와인을 마주하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자연주의 와인은 필터링이나 청징 과정을 거치지 않아 약간 흐려 보일 수 있다. 야생 효모와 자연 성분이 그대로 남아있어 더 풍부한 풍미를 준다. 레이블에 'Unfiltered'나 '무여과' 표시가 있으면 이런 스타일이다.
두 번째는 보관 상태가 나쁜 경우다. 온도가 높거나 변화가 심하면 단백질이 응고되어 흐려진다. 미생물이 번식하면 재발효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와인은 식초 냄새나 곰팡이 냄새가 나고, 맛도 시큼하거나 이상하다.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자연주의 와인은 레이블 표시가 있고 향과 맛이 정상이다. 변질된 와인은 냄새부터 이상하고 맛도 불쾌하다. 오래된 와인의 침전물은 정상이니 디캔팅으로 걸러내면 된다. 흐린 와인을 마주했을 때 그 이유를 파악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숙성했나가 색에 드러난다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과 스테인리스 통에서 숙성한 와인은 색이 다르다. 오크통 숙성 와인은 색이 더 진하다. 페놀 성분이 더 많이 잔류하기 때문이다.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레드 와인은 안토시아닌 구조를 강화하여 붉은색을 더 오래 유지한다.
새 오크통과 사용한 오크통의 차이도 있다. 새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은 색이 더 진하다. 오크통 내부를 불에 그을리는 정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강하게 그을린 오크통은 색과 향이 더 강렬하다. 약하게 그을린 오크통은 미묘하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 더 명확하다. 오크통 숙성을 거친 화이트 와인은 황금색이 진하다. 스테인리스 통에서만 숙성한 와인은 연한 레몬색이다. 샤르도네가 대표적이다. 부르고뉴의 오크 숙성 샤르도네는 진한 황금빛이다. 샤블리의 스테인리스 샤르도네는 맑은 연노란색이다.
오크의 산지도 색으로 읽힌다
프랑스 오크와 미국 오크의 차이도 색에 영향을 준다. 미국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은 색이 좀 더 진하고 어두운 경향이 있다. 미국 오크는 바닐라와 달콤한 향이 강한데, 이는 락톤류를 2-4배 더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리오하 와인이 대표적으로 미국 오크통을 사용한다.
프랑스 오크통은 상대적으로 더 미묘하고 우아한 색을 만든다. 프랑스 오크는 목질이 더 단단하고 수분 함량이 적다. 리무쟁, 알리에, 보주, 트롱쉐 같은 프랑스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다. 부르고뉴 와인이 프랑스 오크의 좋은 예다.
콘크리트나 암포라(토기)에서 숙성한 와인도 있다. 이런 와인은 오크의 영향이 없어 색이 더 자연스럽다. 포도 본연의 색이 잘 드러난다. 자연주의 와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색이 전부는 아니다
와인 색으로 많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색은 첫인상일 뿐이다. 향과 맛을 봐야 완전히 안다. 때로는 색이 잘못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색이 진한데 맛은 가벼울 수 있다. 색이 연한데 맛은 진할 수 있다. 양조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생산자는 의도적으로 색을 진하게 만든다. 소비자들이 좋아하니까.
그래도 색은 중요하다. 첫 단서다. 와인을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색을 보는 연습을 하면 와인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와인과 어느 정도 시간을 가져 보면 "아, 이건 오래된 와인이구나" 정도는 알 수 있다. 와인을 마실 때 천천히 색을 봐라. 잔을 기울여 스펙트럼을 확인하라. 가운데와 가장자리의 색 차이를 본다. 투명한지 확인한다. 그리고 한입 마신다. 색으로 예상한 맛과 실제 맛을 비교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와인이 더 재미있어진다. 색만 봐도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 참고 서적: 《와인, 이야기로 피어나다》조동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