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간의 바투 동굴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명소인 바투 동굴은 힌두교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에 인도인들이 찾아온다는 힌두교 성지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바투 동굴의 주인은 힌두교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아들 무르간이다. 숏하게 말하면 어머니의 지혜가 부족해 무르간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당의정 같은 말만 한 첫째 아들 가네샤 편을 덥석 든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신이나 사람이나 엄마 노릇이 참 어렵다. 사춘기 아이라면 치킨 한 마리 사 먹이는 것으로 응어리가 풀렸을 테고 기껏해야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것에서 그쳤을 텐데 나름 신의 자식이라고 과감히 가출을 하고 동굴로 들어가 버렸으니 말이다. 무르간의 어머니는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들을 찾아가 이전처럼 만나주기를 애걸복걸했다. 헤어졌던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칠월 칠석처럼 모자가 다시 만나는 날이 힌두교의 큰 축제로 이곳에서 해마다 성대하게 열린다.
바투 동굴 입구에는 번쩍이는 황금빛 거대한 동상이 있다. 바로 무르간이다.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한 정말 산만한 크기였고 그 뒤편으로 알록달록 색을 칠한 계단이 동굴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충 눈으로 헤아려봐도 계단이 심하게 많았다. 정확히는 272 계단.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나 저지르는 죄가 272가지여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죄업을 씻을 수 있단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가 죄인이라는 소리인데 어쩌다 들른 관광객들은 졸지에 대역죄인이 되어 참회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수가 많은 것이야 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겠거니 체념하며 오르는데 계단의 경사도 심하고 가팔라 두려운 마음이 더 힘들었다. 가뜩이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란 사람에겐. 날은 덥고 온몸에 있는 땀구멍에서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각자의 죄업은 땀으로 씻는 거였나 보다. 뒤를 돌아보지 말자, 앞만 보고 걷자 다짐하며 272 계단을 끝까지 올랐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한편에선 기도를 드리는 작은 사원이 있었고, 안쪽은 복층 구조와 같아서 약간의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거기에도 기도 공간이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의 일부가 둥그렇게 뚫려서 파란 하늘이 그대로 보였고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며 신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물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고개만 돌리면 여기저기 힌두교 조각상과 종교적 물품들이 보여서 마치 거대한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땀이 식어갈 무렵 다시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오를 땐 또 그것대로 힘들었는데 내려가려고 보니 아래가 아득하다. 분명 운을 빌러 갔는데 올해 운을 다 쓰고 내려와야 할 판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칫하면 저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기 십상이었다. 다쳐서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숏츠로 모자이크 된 내 얼굴이 수십억 인구의 핸드폰에서 핸드폰으로 옮겨 다니며 글로벌한 웃음거리가 될게 분명하다. 삐질 삐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냉큼 정신을 차리고 셀프 토크를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혹여 옆사람이라도 들을까 작고 낮게 읊조리면서.
분명 죄업을 씻으러 올랐는데,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죄는 지웠는데, 운은 다 썼고. 힘들게 다 팔았는데 뭔가 남는 게 없는 장사 같았다. 불경스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