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녹지가 펼쳐진 팔레 루아얄에서 한 발짝만 빠져나오면 이렇게 파리 뒷골목이 펼쳐진다. 그리고 조금만 더 걸어 나오면 메종 마르지엘라가 있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내가 한창 빠져있던 브랜드다. 스니커즈나 백팩과 같은 액세서리도 미니멀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여성적인 느낌보다는 중성적이면서도 시크한 느낌이랄까. 한창 빠져서 마르지엘라의 향수까지도 들였었더랬다. 트레이드마크인 1부터 나열된 숫자와 실밥. 어떻게 저런 재미있는 요소들을 넣었을까.
이 거리의 매장에 들어가면 좋은 것은, 손님이 들어가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부담 없이 찬찬히 상품을 둘러보게 하는 걸 선호하는 나로선 셀러들의 이런 태도가 편하다. 그렇다고 뭔가를 물으면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엉뚱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이 옷 내가 입으면 남의 것 얻어 입은 것 같지 않니?"
같은... 그녀의 대답은 굳이 옮기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확 눈에 들어오는 제품이 없어 별다른 소득 없이 마르지엘라 매장을 나왔다. 이젠 르라보로 갈 차례. 국내에 르라보 붐이 생겼을 즈음이라서 파리에 가면 꼭 들러야지 생각했던 향수 브랜드다. 내 취향에 맞게 향을 조향 해주는 건 아니지만, 구입한 날짜와 이름 같은 것을 향수병 레이블에 프린팅 해주기 때문에 마치 나만의 향수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마르지엘라 근처에서는 생또노헤 거리에 위치한 르라보가 가까웠다.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르라보 특유의 우디하고 쌉쌀한 향. 걸어오느라 지친 내게 셀러가 시원한 차를 한 잔 권한다. 마침 덥고 목말랐는데 고맙다. 한숨 식히고 의자에서 일어나 차례차례 시향 했다. 내 취향은 머스크와 은은한 플로럴이다. 우디와 시트러스 계열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쪽은 제외하고 머스크와 플로럴 쪽만 팠다. 파리 익스클루시브 향인 Vanille44는 조금 과했고, 여러 개 중에 고민하다가 결국 선택한 것은 Labdanum18. 많은 향 중에 내 취향을 찾으니 별거 아닌데 괜히 가뿐하다.
르라보 건너편엔 그릇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파리에 오면 꼭 들른다는 Astier de Villatte가 있다. 이 당시 나는 크게 그릇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내부를 휙 돌아보고 나왔을 뿐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매장 안에 머문 시간이 사뭇 달랐겠지. 화산재가 들어간 점토로 만들어진 그릇이라는데, 들어보니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몇 번 들고 나르다 깨버릴 듯한 유약한 접시랄까. 무엇보다 가격이 어마무시했다. 이거 하나 깨면 얼마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얌전하게 접시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나왔다.
그가 소개해준 카페는 팔레 루아얄에서 가까운 'Le Nemours'. 카페 키츠네 의자에 걸터앉아 거만하게 턱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한 곳이다. 이 근처에서 쇼핑하다가 한 잔 하기에 좋다며. 꽤 유명한 듯,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입구에서 북적거리는 카페를 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쉬어가기로 했다. 서버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으니 그런대로 앞자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 앉은 걸 바로 후회하게 됐다. 이 카페는 흡연자 천국이었다.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피워대는 담배연기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파리에서 나름 긴 시간을 보내서 이젠 익숙해진 것인지, 비흡연자였던 그가 이런 곳을 추천했다는 게 신기했다. 아님 오랜만에 한방 먹은 건가...
그래도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에 이른 이 시간, 파리지앵들로 넘쳐나는 이 카페에 함께 앉아 있다는 생동감으로 담배연기는 잠깐의 불편함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앞뒤로 들리는 프랑스어 속에서 혼자 오도카니 앉아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들고 온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카페 밖 오가는 사람들, 카페 안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 온 후 처음으로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진 느낌. 묘하게도 이렇게 시끄럽고 번잡한 시장통 같은 카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