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파리 (9)

by bonbon

비앤비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와인샵.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저 조그만 하얀 댕댕이가 눈에 들어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판매하는 와인병도 와이너리에서 리들링 하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를 해 놓아서 눈에 띄었던 곳.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내추럴 와인이 한창 인기를 끌며 내추럴 와인샵, 와인바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때 파리에는 이미 내추럴 와인샵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또한 내추럴 와인을 주로 다루었던 곳. 이후로도 이곳을 지나갈 때 테이블에서 시음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는데, 마음 같아선 뛰어들어 함께 하고팠던. 혼자 여행을 하면 함께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게 아쉽다.

비앤비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파리에 와서 아마도 처음으로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 아닐까. 나흘째 접어드니 시차도 조금씩 익숙해진다. 저녁부터 축 늘어지거나 이른 새벽에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일은 덜해졌다.


다음날 아침엔 근처 마트에 들러 장 봐온 식빵과 버터, 치즈, 햄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취사가 충분히 가능한 비앤비임에도 파리에 도착한 이후 계속 밖에서 사 먹었던지라 "양심상 한 두 번은 해 먹자"는 생각이었지만, 결국 여행 내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해 먹었던 식사였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 가져간 햇반과 컵라면도 돌아오는 날 비앤비에 모두 두고 왔으니까. 그래, 여행지에선 현지 음식을 사 먹는 게 최고지.

비앤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The Broken Arm이 있다. 1층은 카페, 지하 1층은 편집샵인 이곳은 커피도 맛있을뿐더러 편집샵엔 독특한 아이템이 많아 인기다. 그 아이템들이 대체로 가격이 높다는 게 함정. 지하 매장을 스윽 둘러보고 미련 없다는 듯 쿨하게 1층으로 올라와 라테를 주문했다. 이번 파리 여행에서 마신 라테 중 내 입맛엔 여기가 두 번째로 맛있었던 곳이라 말하고 싶다.

브로큰암 근처엔 너무나 유명한 서점, ofr이 있다. 무심하게 척척 쌓아놓은 책과 더 무심하게 걸려있는 드로잉들. 저 안쪽엔 자그마한 갤러리도 있다. 예술서적들이 많은 이 서점에서는 가끔 낭독회 같은 자그마한 행사도 마련되는 것 같았다. 한편엔 티셔츠, 에코백도 무질서하게 걸려있다. 지금도 서울에서 길을 걷다 보면 ofr 에코백을 든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물론 나 또한 그중의 한 명. 아마도 이제는 ofr Seoul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서촌에 입점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서점 구경에 한 눈 팔려 톡이 온 걸 늦게야 발견했다.

"어디?"

"마레, 서점~"

"저녁, 센 강?"

암호같이 오가는 단문답 형식의 톡.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콜"


아침에 해 먹은 샌드위치가 부실했던 걸까. 금세 배가 고파온다. 요 옆에 브런치카페 'Season'이 있다는 게 갑자기 고마웠다. 배가 고프면 일 분도 못 참는 스타일. 지금 이 순간 가까이에 맛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오픈한 지 얼마 안 됐는지 실내엔 빈자리가 많았다. 그렇담 당연히 창가 쪽으로. 'Season'은 이때만 해도 생긴 지 얼마 안 됐지만 근방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그 먼 서울에 있는 나도 알고 찾아간 곳이니. 전통적인 프랑스 식당 같은 느낌이 아니라 모던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이랄까.

팬케익을 주문하고 물 한 잔을 따라 마시며 내부를 훑어보았다. 앉아있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10대, 아니면 20대 정도. 뒤 쪽의 한 프랑스 여학생(인 듯해 보이는)은 음식이 나오자 아이폰을 꺼내 항공 샷, 측면 샷, 온갖 앵글로 사진을 찍는다. 그때까지 접시엔 손도 안 대고 가만히 지켜보는 점잖은 남자 친구. 그래, 저 루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구나.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서버가 내 팬케익을 들고 왔다. 두툼한 팬케익과 위에 올라가 있는 보기만 해도 살찔 것 같은 토핑들. 나도 사진 하나 서둘러 남기고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맛은, 음... 지극히 아메리칸 스타일의 메뉴지만 파리에 와서 먹으니 또 색다르구나, 정도. 맛이 없었다는 건 아니고, 단지 그랬다는 거다. 내가 앉은 자리는 큰 통창 바로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밖을 보고 앉아서 먹게 돼 있다. 식사하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니 파리엔 멋쟁이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꾸안꾸' 정석을 제대로 관람하는 느낌.

ofr, The Broken Arm, Season... 등이 포진한 이쪽 골목엔 이 같이 힙한 브런치 카페와 레스토랑, 와인바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골목이 길게 형성되진 않아서 (물론 지금은 더 확장되었을 수는 있다) 먹고 마실 곳이 많지는 않지만, 매장 하나하나가 개성 있고 인기가 있어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저녁에 지나가는 길이면 어느 한 곳, 손님들로 꽉 차지 않은 곳이 없었다. 웃고 떠들고 담배 피우고 마시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그만큼 핫하다는 얘기. 저녁 어스름 떠들썩한 그 골목을 걷는 걸, 그래서 즐겼다.


맛난 라테에다가 두툼한 팬케익으로 배도 채웠겠다,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진 마레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센 강 방향으로 좀 더 걷다 보면 쇼핑 거리가 나오고, 그 옆엔 피카소 뮤지엄이 나온다. 그 사잇길로 주욱 걸어가면 쇼핑거리에서 약간 떨어져서인지 비교적 조용한 골목이 나온다. 유기농 마트에서 장 봐 가는 사람들, 곧 문을 닫을 것만 같은 베이커리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 나처럼 어슬렁어슬렁 걷기만 하는 사람들까지. 아담하고 평온한 거리.


정처 없이 가다 말다 하다 보니 쉬기에 딱 괜찮을 것 같은 바를 발견했다. 오픈 테라스 형식의 바이지만, 아름드리 나무 그늘이 져서 뜨거운 태양에서 비켜나 있다. 'Le wood'라는 이름이다. 이름이랑 딱 맞는 것 같아. 화이트 와인 한 잔 주문해 놓고 여행 내내 들고 다닌 책을 꺼내 읽는다. 조용해서인지 글자도 눈에 잘 들어온다. 여행 와서 여행 에세이를 읽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다.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지를 여행하는 느낌.

책에 열중해 있는 사이, 뭔가가 눈앞을 지나간다. 비둘기들. 오랜 시간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을 비둘기 떼다. 그런데, 가만... 너무 날씬하잖아. 서울에서 길을 막는 비둘기들은 종종 과하게 퉁퉁해서 '닭둘기'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이곳 파리의 비둘기들은... 얇다. 여긴 먹이에 야박하니? 먹을 게 없니? 이게 뭐라고 이 다름이 신기하다. 그렇게 비둘기들을 보며 혼자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퍼뜩 그와의 저녁 약속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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