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파리 (12)

by bonbon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뻐근하다. 다리는 천근만근 쑤신다. 어제 긴 산책의 여파인가 보다.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간 그는 더 피곤하겠지. 심지어 출근까지 했다면. 아침까지 파리 밤공기의 여운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어제 산책이 많이 좋았나 보다. 이럴 시간이 없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해 본다. 오늘은 파리에 오기 전부터 노리고 있던 가방을 겟하러 갈 생각이다. 오픈 날짜와 동선까지 염두에 두고 시간을 빼놓았다.

매장이 비앤비에서 얼마 멀지 않아 천천히 걸어갔다. 내 걸음으로 25분쯤 걸었나. 땀이 삐질삐질 올라올 때쯤 구글맵에 표시해 둔 지점이 가까워졌다. '라 가르송'은 한국에선 온라인 쇼핑으로만 이용했던 편집샵이다. 내가 원하는 브랜드가 이 샵에 입점돼 있다고 해서 서울에서부터 먼 길 찾아왔다. 바로 'RSVP'. 지금은 마레지구에도 단독 매장이 있고 한국에서도 매장을 찾을 수 있지만, 내가 파리를 방문했던 당시엔 막 브랜드 론칭이 시작된 시점이어서 별도 매장 없이 편집샵에 입점돼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매장에 들어섰다. 막상 샵에는 DP 된 제품이 별로 없어 물어보니 담당자를 부르겠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십여분 정도 다른 제품들로 눈요기를 하고 있었나. 잘 생긴 프렌치 남자가 박스 더미를 들고 위층에서 내려온다. 박스를 여니 다양한 색상의 클러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라인으로만 감상하던 아이들이 자태를 드러내니 신난다. 이중 점찍었던 카멜색과 와인색 중에서 고민하고 있으니 '그 프렌치 남자'가 이해한단다. 와이프도 결국 카멜과 와인 컬러 모두를 갖게 됐다며.


알고 보니 그는 RSVP Paris의 founder 중 한 명이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지난달 서울에 다녀왔다고 한다. 팝업스토어를 열 계획이라서 미팅을 다녀왔다고. 더욱 반갑다. 가방 사는 건 뒷전,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수다 끝에 묵고 있는 비앤비 근처의 힙한 레스토랑까지 추천받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고민 후 와인 컬러 클러치를 품었다. (결국 한국에 들어와서 온라인으로 카멜 컬러까지 구매했다는 건 안비밀)


오후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빨리 움직여야 하지만 배에서 아우성이다. 샵 근처의 Eric Kayser에서 잠봉뵈르 샌드위치를 픽업해 길거리 벤치에 털썩 앉아 베어 문다. 둘러보니 근무 중 점심을 때우러 오피스에서 나온 듯한 직장인들이 보인다. 그들도 나처럼 길거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베어 먹고 있다. 그 모습에 괜히 나도 마치 파리지엔느가 된 것 마냥 기분이 넘실댄다.

빵을 먹으니 커피가 아쉽다. 비앤비 거의 다 와서 보니 'Lily of the Valley'가 눈에 띈다. 자그마하니 카페 이름도, 글자 폰트도 귀엽다. 목마르니 어서 입장. 들어가니 커피보다는 티가 메인인 것 같다. 병에 담긴 시원한 복숭아 주스를 주문하고 둘러본다. 천정이 온통 싱그러운 초록과 꽃이다. 음료를 픽업해 가려했지만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잠시만 더 머물고 싶어졌다. 아이폰을 꺼내 톡을 날린다.


"시간 좀 늦출까?"

"왜? 낮술 하고 싶다며"

"그, 그렇긴 하지" (자식, 민망하게...)


결국 약속시간을 조금 늦추고 앉아 요 며칠 꺼내지 않았던 키보드를 연다. 하지만 몇 글자 끄적이다 이내 멈춤.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좋긴 한데. 인천공항을 떠나올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단 며칠 만에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로 차오르고 있다. 이렇게 간사한가, 사람 마음이.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잠시나마 무거운 생각들을 보류해 놓고 싶은 걸까.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시계를 보니 이제 정말 약속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서둘러 비앤비에 짐을 놓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떠났다.

와인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알아두었다는 와인샵 'La Quin Cave' 간판이 저기 보인다. 이 당시 파리에는 이미 내추럴 와인이 컨벤션 와인만큼이나 확실한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한국은 지금 한창 성행이지만. 컨벤션 와인이 내 취향이지만 이때는 한창 내추럴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는 상태여서 그가 찾은 와인샵이 내추럴 와인을 다룬다고 하니 더 궁금하고 설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와인을 골라 그 자리에서 바로 따서 마실 수 있는 와인바이기도 했으니까. 낮 와인을 좋아하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선택.

지금 서울엔 성수, 한남, 용산 등 힙하다고 소문난 동네에 내추럴 와인샵이 많이 생기고 있다. 많이는 가보지 못했지만, 몇몇 방문한 그들 샵의 모습이 사뭇 지금 저 사진과 닮아 보인다. 물론 서울의 와인샵이 훨씬 더 감각적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식사 메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간단한 치즈와 바게트를 안주로 즐길 수도 있다. 환한 낮에 덥기까지, 이럴 땐 화이트로 시작해야지. 선반에서 와인을 골라보지만 결국 매니저가 추천해 주는 와인으로 pick.

오크통이 테이블인 것도 재미있다. 한 잔씩 따라 마시는데 매니저가 바게트와 치즈를 내 온다. 주변 상인인지 잠시 들어와 매니저와 수다를 한창 떨다 간다. 눈치를 보아하니 저 매니저는 owner인 것 같기도 하다. 궁금한데...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다면 벌써 물어봤을 텐데. 아니 서울이었다면 이미 자리에서 한 잔 하자고 했을 텐데.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는 건 금방이다. 그다음부턴 모터 달린 듯 와인잔이 비워졌다. 와인바에서 나른하게 와인 한 잔, 오래 굶었으니까. 그래. 생각나면 어떻고, 안 나면 어떤데. 채워지고 비워지는 와인잔에 생각이라는 걸 흘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