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그는 이미 출근한 듯했다. 침대에서 일어서자 머리가 핑 돌며 지끈. 엄청 퍼마셨구나. 그 밤 와인바에서 두병을 비우고 15구 에펠탑 근처 그의 집으로 와서 2차를 시작했다. 속도 쓰리다. 보통 배를 어느 정도 채운 후 와인을 마시는데, 어젠 저녁이 너무 부실했어. 빵 쪼가리와 치즈가 다였으니. 사실 와인바에선 식전주로 살짝 마시고 저녁엔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식사를 하려 했는데 일찍부터 너무 달렸다. 내가 그렇지 뭐.
톡을 확인하니, 벌써 회사란다. 대단한 자식. 둘이 마시면 항상 나만 죽는다. 억울해. 하지만 내가 그의 두 배나 마시니 할 말은 없긴 하다. 해장이 필요하다. 비앤비 근처에 눈여겨보았던 쌀국수집이 생각났다. 검색해 보니 나름 유명한 곳인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의 리뷰도 꽤 많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Song Heng'이라는 베트남 쌀국수 레스토랑인데, 외관으로 보이다시피 규모는 아담한 편이다. 테이블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일행끼리 테이블 합석은 기본인 듯하다. 나 또한 모르는 사람과 테이블을 셰어 하며 쌀국수를 먹었다. 불편하고 아니고를 떠나 해장이 너무 필요했기에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곳의 쌀국수는 베트남에서 먹었던 쌀국수와 사뭇 비슷했다. 거칠면서도 진한 국물이 느껴지는 맛. 디쉬를 무심하게 내 오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한국의 베트남 레스토랑은 이보단 훨씬 정돈된 느낌이다. 물론 지금은 한국에도 베트남 현지 스타일로 쌀국수를 내는 곳이 예전보다 많아지긴 했다.
쌀국수 한 그릇을 뚝딱하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정말 '흡입'했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해치웠으니까. 다 먹고 나서야 살짝 민망함이 올라온다. 테이블 회전이 엄청난 곳이라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왔다. 비앤비에 들러 짐을 챙겨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숙취에 마냥 뻗어있을 수는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컨디션이 다운될 테니. 마레지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먼저 가까운 Enfants Rouges 시장으로 향했다. 아주 자그마한 시장이다. 커피나 간단한 식사를 파는 곳도 있다. 치즈가 수북이 쌓여있는 매장도 보인다. 파리에 오면 치즈와 버터에 눈이 돌아간다. 서울보다 훨씬 싸고 종류도 많고. 유통기한이나 반입에 문제만 없다면 몇 톤이고 이고 지고 들어오고 싶다. 어렸을 때엔 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사람 입맛은 계속 변하는 것 같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고서부터는 냉장고에 치즈는 계속 쟁여두게 된다.
피곤한 나머지 마레지구 내에서만 설렁설렁 돌아보기로 했다. 거리를 걷다 보니 또 허기가 진다. 과음한 다음날, 계속 배가 고픈 건 나만이 아니겠지? 아침에 쌀국수로 속을 달래줬으니 이번엔 기름진 포만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두툼한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지. 며칠 전 메종 키츠네에서 쇼핑을 하다가 봐 둔 'Blend'가 퍼뜩 생각났다.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메뉴판을 보니 와인도 있다. 햄버거 집에서 와인을 파는 파리의 '클라쓰'. 심지어 로제, 샤도네이, 론, 보르도까지 리스트도 나름 다양하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해장술까지 하는 건 내게는 저세상 레벨이다. 처음 방문한 레스토랑에선 뭐니뭐니 해도 시그니처가 최고. 시그니처 버거와 콜라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레스토랑이 참 아기자기하네. 카페처럼 만들어 놓은 이곳이 편안했다. 북적대지도 않고, 시간대가 어중간해서인지 사람도 별로 없고.
드디어 내게로 온 햄버거. 빛깔이 곱다. 생각보다 사이즈가 자그마해서 실망했지만 맛은 충분했다. 몇 번 베어 먹었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쉬었다가 이동하기로 하고 콜라를 마시며 갖고 다니는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슬슬 들어차기 시작한다. 동양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곳인가 보다. 손님 중 많은 사람들이 어리거나 젊은 동양 사람들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좀 더 마레 중심가 쪽으로 걷다 보니 보쥬광장이 나타난다. 다른 공원들에 비해 작고 아담하다. 동네 공원 같은 느낌. 친구들끼리, 혹은 가족끼리 앉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풀밭 위에서 편안하게 늘어져 있는 그들이 부러웠지만 스커트를 입고 나오기도 했고, 돗자리가 없어 앉지는 못했다. 공원 한 바퀴를 돌며 둘러보다가 결국 광장 한 끝에 위치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Ma Bourgogne'는 꽤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있었던 카페테리아인 듯 외관에서부터 옛 정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서버도 나이가 지긋하신 무슈로 유니폼도 굉장히 포멀 했다. 메뉴판의 젤라또가 눈에 띈다. 그래, 과음한 다음날은 무조건 아이스크림이지. 쌀국수, 햄버거, 아이스크림, 해장 3종 세트로 오늘을 마무리해 보자. 아이스크림에 초콜릿까지 덤으로 내준다. 득템. 알코올로 머릿속이 꽉 차서인지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들지는 않았다. 먹고, 걷고, 멍 때리고, 읽었던 시간. 파리 여행 7일 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