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파리 (14)

by bonbon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언니, S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면서 연락한 내게 S는 대뜸 파리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미슐랭 레스토랑 하나 갑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선 멋진 레스토랑에 함께 갈 마음 맞는 친구가 아쉽다. 물론 S의 얼굴을 몇 년 만에 보는 기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만나서 할 얘기가 산더미 같을 수도, 어제 만났다 헤어진 듯 별거 없기도 하겠지. 하지만 S와 만나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파리 현지의 바이브를 느끼며 먹고 마시는 일이다. 그녀와 내가 죽이 잘 맞았던 그것. 사실 이번 파리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었던 부분이다.

다행히 레스토랑은 비앤비에서 멀지 않다. 아니, 섬세한 S가 이것까지 염두에 두고 식당을 예약했겠지. 마레지구를 여러 번 종단하고 횡단했지만 바스티유 광장까지는 닿지 않았었다. 생각보다 크고 산만한 광장. 하지만 여길 건너 건너편 동네로 가면 마레지구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그 당시 이쪽에 새롭게 생기는 레스토랑들이 힙하다고 들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한 시간 넘게 남았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괜찮은 카페가 있을지 검색했다. 구글링에 걸린 곳은 'Passager'. 막상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좋다. 아늑하고 환하다. 전체적으로 조용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가 아니라 활기를 띠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유쾌하게 포즈를 취하며 받아주는 매니저가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7~8할은 차지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 마신 라테는 내가 파리에서 마신 라테 중에 단연코 베스트였다. 적당하게 꼬수운 우유와 적당하게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커피에서 쓴 맛밖에 잘 느끼지 못하는 커알못이라 우유가 섞인 라테를 좋아하는데, 내 취향에 딱 맞는 블렌딩이었다. 다음 파리 여행에도 이곳을 꼭 방문하겠다고 다짐하게 했던 맛이다. (실제로 이듬해에 방문했지만 저 멋진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라테 맛은 그대로였다.)

커피도 맛있고, 카페도 맘에 들고. 영 진도가 안 나가던 책도 여기선 책장이 가볍게 넘겨진다. 더 머물고 싶은 공간이었지만 약속시간이 다가와 일어섰다. 떠나는 내게 환하게 손 흔들며 굿바이 인사를 하는 매니저 덕분에 한 번 더 웃을 수 있었다. 유쾌한 에너지는 전염성이 강하다.

런치타임에 맞춰 레스토랑 앞으로 갔다. 다다르기 몇 미터 전,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S를 발견했다.

"언니~"

파리에서 부르는 '언니'라니. S를 만나니 순식간에 이곳은 파리가 아니라 서울 어딘가가 되어버렸다. 한걸음에 달려가 손을 맞잡으니 더 반갑다. 뻔한 루틴이지만 필수 과정, "더 예뻐졌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인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좋은 사람에겐 좋은 말을 더 해주고 싶다.

S가 신경 써 예약해 둔 곳은 'Septime'이다. 미슐랭 1 스타이기도 하고, 가성비가 착해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식당. 덕분에 예약하는데 품이 좀 들었다고 한다. 레스토랑 분위기도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딱 적당한 선이다. 편안하면서도 친근한,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일. 역시 잘 통해.


홀에 생각보다 많은 서버들이 있어서 놀랐는데, 우리 테이블을 담당한 금발의 여성 서버가 무척이나 친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를 하는 손님들의 국적도 다양한지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뜻 모를 언어들이 오갔다. 그렇다고 너무 시끄럽지는 않아서 부산하진 않았다.


메뉴는 총 4코스로 애피타이저 2개, 메인은 고기와 생선 메뉴 중 선택해서 1개, 디저트 1개로 구성된다. 이렇게 해서 점심은 총 42유로. ('17년 기준이다.) 생선과 닭고기 둘 다 맛보기 위해 하나씩 주문했다. 그리고 물론 상세르 블랑까지.


전체적으로 가볍고 산뜻한 느낌의 식사였다. 맛에 일가견 있는 편은 아니지만, 재료의 신선함을 잘 살리고, 간도 치우침이 없이 누구나 좋아할만하게 맛을 잘 잡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와인에 좋은 사람까지 앞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신나게 수다 떨며 먹고 마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