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스러운 식사 후 마레 쪽으로 건너와 쭉 걸었다. 눈에 띄는 매장이 있으면 곧바로 들어가 아이쇼핑하고 서로 어울린다 아니다 이야기해 주고, 혼자일 땐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지갑도 둘이 되니 쉽사리 열리게 된다. 그다지 필요 없는 예쁜 쓰레기까지 충동구매하는 것도 용인되는 시간. S와 함께 파리를 걸으니 신이 났다. 혼자가 아니라 좋았다.
이번엔 내가 S를 이끌었다. 요 며칠 마레의 거리를 걸으며 눈도장 찍어놓았던 'T'cup'이다. 막상 들어가서 보니 파리보단 런던 분위기의 브런치 카페랄까. 내부가 생각보다 널찍해서 놀랐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그림과 오브제들이 있는데, 프렌치 감성과 영국 뉘앙스가 묘하게 뒤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인지 내부엔 손님의 거의 없었다. 우리가 거의 전세 낸 듯한. 이런 거 무척 좋아한다.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오랜 시간 땡볕에 걸어서인지 덥고 목마르다. 어서 마실 것부터 시키자. 주문한 아이스티와 스콘이 나왔다. 마음에 쏙 드는 큼지막한 저그에 담긴 음료와 넉넉한 얼음조각들. 이곳을 선택한 나 자신을 칭찬해.
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이야기 나누었다. "맛있다, 예쁘다, 좋다"는 감탄사가 오가며 흥분했던 1차를 마무리하고 진지한 토크로 2차를 시작한 느낌. "사실은 말이야...", "요즘 난..." 이런 류의 이야기들. 물론 서울에 두고 온 '그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진 않았다. 지난 일주일간 뱉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한바탕 쏟아내면 가슴에 꽉 막힌 답답증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으니까. 적절한 단짠단짠, 업 앤 다운의 바이브.
아쉬운 시간이 다가왔다. S와 헤어져야 할 시간. 이제 그녀는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난 혼자만의 여행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지금은 같은 땅 위에 있으니까. 그게 또 묘하게 위안이 된단 말이지. 마지막 인사로 서로 꼭 안아준 다음 각자 갈 길을 갔다.
다음 목적지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 이때가 이번 파리 여행 중 기록적으로 더웠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퐁피두 센터 광장에 도착했을 땐 정수리에 계란을 올려놓으면 익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외부에 난 계단을 오를 때엔 숨이 턱턱 막혔다. 이게 유럽의 여름이라는 거구나, 실감했다.
철골 외관에 배관, 배선이 그대로 밖으로 노출된 모습을 보니 처음 건축되었을 당시엔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듯하다. 지금은 이미 익숙해져서인지 저 모습이 아닌 퐁피두 센터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고전 미술, 인상주의, 낭만주의 쪽이 내 취향에 가깝다. 현대미술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가까이하기엔 멀다고나 할까. 그래도 예측 불가한 예술가들의 감성을 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
퐁피두 센터에 방문한 건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때문이다. 나중에 뉴욕이나 서울에서 열렸던 데이비드 호크니 전을 보기 전이어서, 호크니 작품들을 눈앞에서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사진 촬영은 하지 못해서 담지는 못했지만 작렬하는 파리 여름에 딱 어울리는 전시로 뇌리에 남았다.
더워서 정신을 못 차리며 관람하는 와중에도, 크고 작은 미술관과 전시관으로 풍요로운 파리,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누리는 파리지앵이 부러웠다.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에 갔을 땐 단체로 관람 온 조막만 한 아이들이 작품 앞에서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예술이라는 걸 일상으로 여기며 자라겠구나.
훗날 로댕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파리지앵은 일하던 중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에 작품을 감상하러 왔다고 해서 날 놀라게 했다. 그에게서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조기 교육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자국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형성되게 만들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