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파리에서 일정은 이틀 남았다. 초반 2~3일은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 같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막바지에 달해 있는 게 여행인 것 같다. 그래서 항상 뭔가 아쉽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에 여유 부리다가도 돌아갈 때가 되면 하지 못한 일들이 수만 가지 생각난다. 하다못해 숙소 앞에 있기에 언제든 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블랑제리도 아쉬워진다.
저녁식사는 내친김에 S가 추천해 준 레스토랑으로 가기로 했다. 'Le Fumoir'로, 루브르 근처에 있는 매우 유서 깊은(?) 식당이라고 한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퐁피두 센터에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이 정도 더위론 날 막을 순 없어. 여행지에선 가까운 거리는 웬만하면 걷는 것을 택한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며 봤던 거리가 내 두 다리로 지날 때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나선 그렇게 한다. 퐁피두 센터에서 센 강 쪽으로 내려오다 샤틀레 역을 지나 루브르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예약을 하지 못해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다. 예약 없이 혼자 와서 그런지 안내된 자리는 레스토랑의 한쪽 귀퉁이였지만, 워낙에 구석을 좋아하는지라 나름 흡족했다. 등 뒤로 벽밖에 없으니 매우 편안하게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다. 한국 사람도 많이 가는 레스토랑이라고 하던데 이 날은 동양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외관에서도 느꼈지만 내부로 들어오니 더더욱 유럽의 클래식한 레스토랑임이 느껴진다.
식사는 앙트레와 플라, 플라과 디저트의 2코스, 혹은 앙트레, 플라, 디저트 3코스 이렇게 선택할 수 있다. 내 선택은 앙트레와 플라. 메뉴를 주문하면 아뮤즈 부쉬와 식전 빵, 그리고 버터를 먼저 내어 온다.
빵과 버터는 프랑스만 한 게 있을까. 처음 파리에서 바게트를 베어 물었을 때의 충격은 잊지 못한다. '겉바속촉'이란 프랑스 바게트가 정석이 아닐까. 딱딱해 보이지만 입을 벌려 '앙' 물었을 때 느껴지는 적당한 바삭함, 그리고 이어지는 말랑말랑한 속살. 반전의 식감에서 느껴지는 매력. 프랑스에 와서야 바게트가 이런 맛이라는 걸 제대로 알았다.
앙트레로는 연어와 horseradish 크림, 플라는 팬 프라이 된 대구와 버섯 요리를 선택하고 화이트 와인 한 잔을 곁들였다. 이런 음식에 와인이 빠질 순 없다. 원래 육지 고기를 집중적으로 파는 스타일인데 이날은 웬일인지 모두 바다로 택했다. 날씨가 더워서 가벼운 음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나 보다.
레스토랑엔 삼삼오오 일행들과 이야기 나누며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 대부분이다. 그중 일행 없이 혼자 온 테이블은 여기 하나. 그렇지만 그다지 부끄럽거나 외롭진 않았다. 낮에 충분히 에너지를 주고 간 S에게 고맙다. 야금야금 디쉬를 비워 가며 사진도 찍고 주변 사람들을 구경도 해 본다. 코와 입과 눈에만 집중된 식사. 만족했다. 배 통통 두드리며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밖은 여전히 환하다.
레스토랑 바로 앞에 비앤비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하지만 조금은 수그러든 태양빛과 이젠 미지근해진 산들바람이 유혹한다. 배도 꺼뜨릴 겸 산책이란 걸 해보기로 한다. 센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람선을 타고 강을 따라 유유자적 흘러가는 여행객들. 몇 년 전 파리를 방문했을 때 바토무슈를 탄 적이 있었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땐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던져 놓고 서울에서부터 미리 예약해 둔 바토무슈로 달려갔더랬다. 어둑해진 파리의 센 강은 예뻤지만,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에 바빴던 여행 첫날밤. 그래서인지 바토무슈는 내게 춥고 졸렸던 기억이다.
하지만 저렇게 유람선에 실려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부러운걸. 지금은 나도 저 풍경 속 인물이 되고 싶다. 강변에 걸터앉아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생각보다 인파가 꽤 된다.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저들 속에 섞여 즐기고 싶지만,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냥 구경하고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알고 보면 나름 소심한 성격이다.
다시 레스토랑 쪽으로 돌아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한참을 오지 않는 버스를 하릴없이 서서 기다리는데, 한 파리지앵이 프랑스어로 뭐라고 말을 한다. 프랑스어를 못한다고 말하자 영어로 바꿔 말해주는 그.
"파업이에요. 안 와요, 버스"
아, 파리에선 밥 먹듯 일어난다는 그 파업.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고 쿨하게 돌아선다. 파리엔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사람도 많지만, 이런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