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이날은 이미 정해 놓은 일정이 있다. 파리에 오기 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하루 종일 어딘가에 콕 박혀 책 읽고, 글 쓰고, 공상하는 일. 직장에 다니는 단기 여행객들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해 왔던 일이다. 바쁜 일정 쪼개서 온 휴가는 시간이 금이니까. 파리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책과 키보드를 챙겨 다니며 머무는 곳마다 중간중간 읽고 쓰기는 했지만, 하루를 다 투자하는 건 처음이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오늘 하루는 무척 소중했다. 여행 첫날부터 이 시간을 기다렸다.
장소도 미리 봐 뒀다. 소르본 대학 근처에 위치한 'Nuage Cafe'로, 구글맵에는 공동 작업 공간이라고 설명돼 있다. 우리나라에도 꽤 확산된 co-working space와 비슷한 개념일 것 같다. 시간당 사용료를 내고 커피는 물론 안에 비치된 빵이나 시리얼, 간식 등을 먹을 수 있다. 추가 비용이 있는 음료수도 있다. 두 개 층으로 돼 있어 장소가 넓고 혼자 스터디할 수 있는 공간, 여럿이 미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체스를 두거나 게임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전반적으로 아기자기하고 cozy 한 공간. 무엇보다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
자리를 잡고 짐을 펼친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과 여행 내내 분신처럼 가지고 다닌 키보드, 그리고 다이어리와 펜. 공간에 물건들이 잘 배치되어야 공부든 일이든 잘 된다. 이 습관은 자취를 시작하면서 정리벽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나왔기 때문에 공복이다. 바리스타에게 진한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토스트를 굽고 시리얼을 담아왔다.
식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생각보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다. 서류를 펼쳐 놓고 노트북 작업을 하는 사람, 전공도서인지 두꺼운 책을 탐독하고 있는 사람, 커플인 듯 보이는 남녀는 나란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내 관심을 끄고 먼저 뇌의 워밍업을 위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다다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바스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울린다. 빠르게 책 속으로 몰입된다.
"아닌 것 같아. 우린 연애 스타일도 다르고 또..."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엔 직접 만나 얼굴 보며 말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톡으로 이별을 고한 그의 비겁함에 화가 났다.
"이게 뭐야,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였니?"
이렇게 답하고 싶었지만, 톡을 받지 마자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신물 났다. 그를 비워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지긋지긋했다.
집착이란 스스로를 좀먹는 행위임을 그때 알았다. 이별의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미련과 집착. 사실 훨씬 전에 정리되었어야 할 관계를 내가 그렇게 붙잡고 있었다. 만남을 이어가는 시간 동안 줄곧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건 관계에서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이라기 보단, 실패하지 않으려는 내 아집이다. 이걸 깨닫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행 내내 알고 있었다. 아니 여행 전부터 알고 있었다. 직접 대면하기 싫어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걸 나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주는 '의식'은 이제 끝났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 또한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답답한 마음에 파리에서 재회한 애먼 P에게 돌려 돌려 하소연을 할 때마다 그의 얼굴에 피어났던 표정이 생각난다. "그걸 왜 내게 묻니?" 그의 타고난 무심함이 야속했지만, 지금은 고맙다. 그리고 부럽다.
글을 멈추고 키보드를 닫으니 어느새 저녁시간이다. 하루 종일 여기서 콕 박혀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정리된 느낌.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순간 강한 '허기'가 느껴진다. 와인에 대한 허기다. 뭔가를 먹고 마셔야겠어. 비앤비가 있는 마레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발견한 와인바 'La Cave de Turenne'. 와인을 한 병 사서 숙소에서 따 마실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커플이 와인을 고르고 있고, 매니저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천정까지 올라간 선반엔 와인들이 꽤 DP 돼 있다. 여기도 내추럴 와인이 대부분인 듯하다.
아냐, 오늘은 마지막 날이잖아. 궁상맞게 숙소에서 혼자 와인을 홀짝이는 건 아닌 것 같아. 바로 계획을 바꿨다. 우선은 비앤비에 짐을 놓고 나와야겠다. 옷도 갈아입고. 가는 길에 갤러리가 눈에 띈다. 'galerie autres images'. 무작정 들어갔다. 한 남자가 몇몇 작품들을 정리하고 있다. 말을 건다.
"작품들이 멋지네요!
"고마워요"
"멋져요. 갤러리 이름도 그렇고..."
"여행? 어디서 왔죠?"
"한국. 서울이요."
"오~"
그 후로 이어진 시답잖은 대화들. 픽, 웃음이 나왔다. 작품에 특별하게 관심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들떴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내 인사하고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