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여름. 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거울 속 내 눈을 보는 것조차 피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어제와 다름없이 똑같은 낯빛으로 회사에 다녀야 했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고, 2주간의 여름휴가는 절호의 기회였다. 몇 년 전 딱 한 번 방문했던 파리가 무척이나 당겼다. 그곳에서 혼자라면 원하는 만큼 시간을 들여 밑바닥까지 나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해 라운지에서 화이트 와인으로 입가심하고 에어프랑스에 탑승했다. 대한항공과 코드셰어 하는 항공편으로, 출도착 시간이 맘에 든다. 마일리지 적립이 100% 된다는 점도. 기내에는 한국인 승무원이 반 정도 되고, 한국인 승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에어프랑스임에도 내 앞자리에 앉은 프랑스 소년이 눈에 띄었다. 옆자리의 누나인 듯한 소녀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낮은 목소리임에도 특유의 프랑스어 억양에 귀가 열린다. 잔잔한 음악 같다.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활주로가 창 밖으로 보인다. 전날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업무로 피곤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곧 떠난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마음 한쪽이 스산해진다. 가방에 챙겨 온 키보드를 꺼냈다. 여행할 때 노트북을 갖고 다니기엔 벅차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지고 다닌다. 아무래도 스마트폰 자판보다는 글쓰기가 편안하므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엔 글을 쓰는 것만큼 좋은 약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도 답은 되지 못한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구겨져 있던 온몸이 피로로 아우성이다. 우버를 불렀다. 우버 첫 사용. 생각보다 괜찮았다.
"날짜를 잘 선택해서 왔어. 며칠 전만 해도 파리 시내 전체가 찜통이었다고. 지금은 지낼만한 거야."
드라이버의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어 교습.
"헤어질 때 하는 인사는 프랑스어로 뭐야?"라고 물었을 뿐인데, 이 동양 여자에게 더 많은 프랑스어를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생긴 건지 끊임없이 단어를 알려준다.
물론 재미있었다. 덕분에 몇 가지 쓸만한 말도 배웠다.
이번 파리 여행 숙소는 마레지구의 비앤비다. 마레지구는 첫 파리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곳이었고, 내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지역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편안했다. 도착 전 왓츠앱으로 호스트에게 연락하니 숙소 바로 밑 자기 사무실로 오란다. 알고 보니 내가 예약한 비앤비 건물 1층에 본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플랫 말고도 몇 군데 함께 운영하는 비즈니스를 하는 모양이었다.
원룸 스튜디오 형태로 트윈베드, 주방, 욕실이 한눈에 보인다. 오래돼 보이는 가죽소파, 책상과 식탁으로 쓰는 테이블이 두 개 있었고, 주방에는 토스터, 전기주전자, 냄비와 그릇 등 있을만한 건 다 있었다. 미리 리뷰를 꼼꼼히 보고 왔기에 큰 걱정은 없었고, 딱 사진으로 보던 그 모습이었다.
호스트였던 Remi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까지 내 무거운 짐을 옮겨다 주었으며, 파리 시내 지도를 펼쳐 내가 갈만한 곳들을 직접 동그라미 치며 자세히 설명해 주는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토스터, 전기주전자, 주방이 조금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용서해 주기로 했다.
단지, 에어컨이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저 작은 선풍기로 여름을 나는 것 같은데 더위를 크게 타지 않는 나이기에 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요즘 같은 유럽 폭염엔 당해내지 못했을 듯. 아직 저 플랫을 운영한다면, 글쎄 지금이라면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오후 2시 반에 공항에 떨어져서 마레지구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넘게 소요, 체크인 후 짐을 풀고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6시가 넘었다. 마음이 급하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 걷고 싶다. 내가 진짜로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기 때문. 대충 마무리하고 지갑을 들고 나섰다.
생각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갗을 스쳐 지나간다. 서울에서 세상 우울했던 나답지 않게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숙소가 위치한 Temple역 주변은 그 당시 새로운 레스토랑과 카페가 많이 생겨나고 있었던 핫한 지역이라 오후 늦게부터 젊은이들의 발길이 몰리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서울 번화가에 비해서는 매우 한가로운 편에 속한다. 어깨가 부딪히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에 파리지앵들로 붐비는 블랑제리에서 크로와상과 바게트를 사고 근처 유기농 마트에서 요거트와 납작 복숭아를 담았다. 사진에 보이는 와인은 Remi가 웰콤 기프트로 선물한 와인. 무슨 와인이었는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붉은 베리향이 올라오는 가벼운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여행지에서의 첫날, 가볍게 한 잔 하고 침대에 들기에 매우 좋은. 덕분에 불면증은 서울에 놓아두고 온 듯, 편안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