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니 카페 내부가 너무 붐벼 적당히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너무 차다. 갑자기 낮아진 기온에 당황스럽다. 긴 팔 옷이나 아우터도 챙겨 오지 않아서 숙소에 가도 걸칠 옷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마레지구엔 쇼핑할 만한 샵들이 차고 넘쳐난다는 것이다.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메종 키츠네에서 맨투맨을 구입하고 건너편 산드로 매장에서 트렌치코트를 장만했다. 마침 파리의 여름세일 기간이라 할인도 되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파리는 일 년에 두 번의 큰 세일 기간(솔드, SOLDES)이 있다. 하나는 6월부터 시작되는 여름세일, 다른 하나는 1월부터 시작되는 겨울 세일이다. 솔드는 1830년 원단 가게로 시작한 시몽 마누리가 재고를 처분할 목적으로 남은 원단을 저렴하게 판매했던 것에서 시작됐고, 이후 그의 직원이었던 아리스티드 부시코가 1867년 프랑스 최초인 백화점 봉막셰를 열며 마케팅으로 이용해서 확장되었다고 한다.
무튼, 이 세일 기간엔 전 세계에서 여행 온 여행객들과 파리지앵들이 뒤섞여 인기 있는 매장은 매우 혼잡하다. 산드로 매장은 옷 하나 입어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아시아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브랜드이다 보니 한국인, 일본인 직원도 근무하고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선 매장에서 만난 한국인조차 반갑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급하게 한 쇼핑에 피곤이 몰려온다. 몸을 따뜻하게 할 뭔가가 필요해. 쇼핑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식욕이 돋는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산드로 매장에서 옆 골목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Fragments cafe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보카도 오픈 토스트가 유명한 곳. 작지만 그래도 오블라디보다는 넓은 편이다.
빈티지한 짙은 잿빛의 간판이 보이면 프하그망에 도착한 거다. 입구 앞엔 자그마한 벤치가 있어 이곳에서 웨이팅 하기도 하고 지나가던 행인이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파리의 여느 카페와 마찬가지로 테이블은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 테이블에 앉으려면 들어서 옮겨야 할 정도다. 옆사람과 팔꿈치를 부딪히며 식사를 하는 건 일상적이다.
습관적으로 카페의 가장 끝쪽까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일렬로 서 있는 테이블의 마지막 자리. 왼쪽 통유리문 밖으로 작은 중정이 보인다. 정면엔 화장실이 보이지만 외관이 나쁘지 않다. 머리 위로는 환풍기인지 선풍기인지가 초를 세듯 천천히 돌아간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다. 맘에 들어. 맘 놓고 멍 때리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실례가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생소한 모습을 접하게 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다 보면 생판 모르는 그들의 일상을 혼자서 상상하게 된다. 이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따뜻한 라테와 아보카도 토스트를 주문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옆 자리에 매우 멋진 파리지앵이 있어 기분이 좋다. 그를 포함해 이 카페 안에 앉아 있는 모두가 일행도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들 홀로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고 있다. 대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카운터에서 빵을 담고 계산을 하는 직원들이 나누는 수다가 있긴 하지만, 가끔 뿐이다. 고요함이 공간을 가득 채워가고 내 머릿속 생각은 제멋대로 흘러간다.
"파리는 장난감 궁정 같아서 별로야. 너무 예뻐서 현실 같지 않다고 할까. 와닿지 않아."
그는 파리를 이야기할 때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왜? 난 좋은데, 파리만의 분위기가 있어. 도시 곳곳에 사연들이 숨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게 좋아."
난 이렇게 대꾸하곤 했지. 여름 휴가지 후보를 두고 파리에 갈 바에야 뉴욕이나 런던으로 가겠다고 우기는 그를 웃으며 바라봤더랬다.
그래, 파리에는 함께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올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