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쇼핑을 신들리게 한 덕분인지, 한 번도 안 깨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창밖을 보니 비가 왔는지 땅바닥이 젖어 있다. 하늘도 회색빛이다. 우선 카페인 충전을 위해 근처 갈만한 카페를 검색했다. 선택된 곳은 Faoundation Cafe. 묵고 있는 비앤비에서 몇 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디저트 박스에 호주에서 자주 먹었던 케이크인 레밍턴이 있길래 물어봤더니 founder인지 owner인지가 호주인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호주식 디저트가 반갑다. 커피와 함께 한 조각 주문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니 테이블엔 빈 커피잔들만 덩그러니 있다. 언뜻 위를 올려다보니 현대적인 조명이 인상적이다. 파리보다는 런던이나 뉴욕에 있을 법한 인테리어다.
마침 카페에 사람도 없겠다, 항상 갖고 다니는 키보드를 꺼내 마음 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집중이 잘 되어서 예상보다 긴 시간을 보냈다. 문득 허기가 느껴져 주섬주섬 짐을 챙겨 거리를 나섰다. 정해둔 목적지는 딱히 없다. 걷다가 꽂히는 곳이 있으면 들어갈 생각으로 천천히 거리를 감상하며 걸었다.
걷던 중 뜻밖의 광경에 길 한복판에서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파리라지만 쓰레기통 주변을 둘러싸고 한껏 쌓아둔 저 많은 빈 와인병들이라니. 큰 쓰레기통 안이 다 찼는지, 밖에까지 늘어놓은 모습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독보적으로 많은 샴페인 병들! 이 사진은 한동안 나의 카톡 프사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십여 년간 와인에 미쳐 있었기에 이 한 컷만큼 마음에 드는 이미지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일행이 있었다면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 했을 것이다.
덕분에 와인이 무척 당겼다. 그래, 화이트 와인을 반주로 해야겠다. 오픈한 식당을 찾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Le Cafe des Musees, 오늘은 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으로 칠해진 이 레스토랑은 전형적인 파리 식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첫째, 가까웠고, 둘째, break time 없이 운영하는 곳이 근처에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들어갔지만 결과적으로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메뉴 중에 Red Tuna marinated in Japanese가 눈길을 끌었다. 파리에서 일본식 양념으로 재운 참치라니, 궁금하다. 간장을 베이스로 하지 않을까 했는데, 비슷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익숙한 맛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exotic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샴페인 한 잔을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다.
주문을 받는 동양인 서버가 활기차다. 오래 일한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내가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음에도 잦은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워낙에 덜렁대는 아가씨였던가. 그럼에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되었던 건, 그녀가 활기차고 밝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실수가 손님들과 즐겁게 대화하던 중에 일어났기에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한국분이시죠?"라고 한국어로 물었으니, 놀랄 수밖에. 나의 테이블에서도 한창 재잘거리다가 매니저가 부르니 그제야 돌아선다. 아마도 part time으로 일하는 유학생인 듯싶다. 맛도 맛이지만, 그녀 덕분에 더 즐거웠던 식사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