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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Oct 01. 2018

오늘을 좀 더 사랑하기로 했다

책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카피라이터

 책 <모든 요일의 기록>은 10년 차 카피라이터 김민철 씨가 쓴 기록 에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히 남자분인 줄 알았고, 책의 프롤로그에서 본인 스스로 '타고난 기억력이 있다'는 말을 보고 굉장히 자신감이 가득하신 분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라고 생각한 것도, 자신감이 가득한 분이라는 생각도 온전히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여자분이었고, 타고난 기억력이 있다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반대였다. 이름은 누구나 충분히 오해할만했지만 '타고난 기억력이 있다'는 한 줄만 읽고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으로 으레 짐작해버렸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단락보다 한 줄의 문장으로 빠른 판단을 했던 지난날의 습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토익 시험 PART 7 문제를 풀 때의 습관이 책을 읽을 때도 곧이곧대로 적용된 셈이다.

2017년, 나의 모든 요일을 기록한 바인더 주간계획


모든 요일을 기록한다니, 책 제목이 참 멋지다. 이미 일상에서 워크플로위와 바인더를 통해 지난 몇 년간 내가 겪은 모든 날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왔을지 모른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같은 구절을 수백 번 읽어도 고스란히 잊어버리는 특별한 기억력 때문에 인생에서 기록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반면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닌데, 기록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읽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책 <모든 요일의 기록> 中


그 답은 이 책의 프롤로그 뒷 장이 아닌, 앞 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기록은 누구나 하지만, 꾸준한 사람은 드물다. 나도 1년에 3개월은 기록을 했지만, 나머지 9개월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기록을 제대로 시작하게 된 건 '블로그'를 시작한 시점과 비슷하다.

  


 바인더와 생산성 도구를 쓰면서 스스로 찾게 된 노하우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블로그에 쓴 활용법을 참고하면서  활용기를 블로그에 하나둘 썼고, 나중에 다시 참고하면서 바인더와 생산성 도구 활용법이 나날이 업그레이드됐다. 처음 티스토리 블로그를 시작할 때 메인 컨텐츠가 없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그냥 많이 쓰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관심 있고, 잘하고 있는 글이 메인 컨텐츠가 되었다. 그렇게 티스토리를 거쳐 지금은 브런치에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런데 글을 쓰고 싶은데 글감이 없는 날은 정말 끙끙거리면서 글을 쓴다. 재료도 없는데 푸짐한 요리를 만들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과거에 기록했던 내용을 살펴본다. 지금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읽지 않았을 내용을 읽으면서 '오, 이런 생각도 했구나', '괜찮은데?'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과거의 나에게 놀란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못해 답답한데,  과거의 내가 지금보다 낫다는 사실에 때론 그 시절의 나를 시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시기심이나 질투가 꼭 남들에게만 드는 감정은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질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다.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감정이다.


여행은 실패가 가득한 일상이다. 음식이 맞지 않아 컵라면이 그리울 때도 있고, 비행기, 호텔 예약을 잘못해서 돈이나 시간을 잃을 수도 있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면 실패의 경험은 더 많아진다. 실패가 많았다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유명한 맛집이나 관광지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실패할 확률은 낮다. 누구나 실패가 없는 여행을 원하지만, 그런 여행은 이미 동선이 짜인 놀이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가 신혼여행에 가서 비행기를 놓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만약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식겁하다.  실패담은 나를 갉아먹는다는 생각에 누구든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음지에 가두기 마련인데, 책 <모든 요일의 기록>에는 실패담이 가득하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방목했던 엄마의 에피소드, 신입사원 때 10년 후 당연히 지금의 회사를 다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다니면서 근속 포상 휴가를 받은 에피소드, 봤던 영화를 또 봐도 처음 본 것 같은 본인의 타고난 기억력을 담은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기록하는 사람이니까, 쓰는 사람이니까 정말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구나. 용감해보였다.


 나도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가끔 쓴다.(그 글 중 몇몇은 다시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한다.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가까운 독자들이 종종 그 글을 읽고 '블로그에 그런 거까지 써도 되냐'라고 묻는다. 물론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다. 음지에 있던 에피소드를 양지로 꺼낸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기하게 한 번 쓰고 나니,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 글에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은  꼭 '제가 원래 댓글을 잘 안 남기는데..'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 밑에 쓴다. 음지에만 있던 에피소드는 그저 내 이야기였는데, 남과 공유하니 '우리의 이야기'가 된 셈이다. 똑 닮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읽는 사람들은 그 글을 읽으면서 알아서 본인을 발견한다. 그럴 때 글을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그 경험을 잊지 못한다.


계속했으니까 안 거다.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안 거다. 지치지 않았으니까 그 열매를 맛본 거다. 지쳐도 계속했으니까 그 순간은 단맛을 볼 수 있었던 거다. 이게 뭐가 될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뭐가 될 거라고 기대를 했다면, 꿈에 부풀었다면, 내 손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재능 없음에 한탄했을 것이다. 쉽사리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계속했으니까. 몸에게 시간을 줬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머리의 말을 몸이 알아들은 거니까. 계속하는 거다. 묵묵히. 계속 가보는 거다. 마치 인생의 잠언 한 줄을 얻은 기분이었다.  책 <모든 요일의 기록> 中


"브런치를 하고 싶어서 작가 신청했는데 한 번 떨어졌다. 다시 신청할 엄두가 안 난다. 어떻게 해야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비법을 알려달라"고 사람들이 나에게 종종 묻곤 한다. 무조건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을 건넨다. 그때 묻던 사람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진다. 그 방법이 뭐냐고 다시 묻는다.


포기하지 않으면 돼요. 그냥 계속 신청해요.


내 대답을 듣고 휘둥그레진 눈동자는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뻔한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계속했으니까,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그 뻔한 사실이 뻔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 주변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로 시선을 돌리면 그 인원이 확 줄어든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에게 블로그에 한 번 글을 써보라며 권해보지만 대부분은 각기 다른 이유로 거절한다. 학창 시절에 머리가 좋은 친구도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계속 쓰지 않으면 그 능력은 '쓸모없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뭔가를 한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비옥한 토양의 주인이 되어 비옥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땅에 이미 '나'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나무가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 이상을 바란 적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책 <모든 요일의 기록> 中



다양한 취미를 가진 가수 겸 배우 김재경 씨는 라디오스타에서 적금 하나도 들지 않고 모든 수입을 취미를 배우는 학원에 쏟는다고 말했다. 그게 가죽 공예, 승마, 스쿠버다이빙 등의 많은 취미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남들처럼 적금을 들고 미래를 설계하기도 했지만, 걸그룹일 때 항상 목표는 '1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재경 씨가 속한 걸그룹 레인보우는 1위 한 적이 없었다. 노력을 많이 했든, 적게 했든 그 과정보다 1위를 하지 못한 결과만이 본인을 옭아매어서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수많은 취미를 통해 그것들을 배우는 순간순간의 과정이 너무 행복하다고 얘기했다. 정말 그 말을 하는 내내 본인의 가치관이 확고해 보였다.



나를 사랑하는 것.


흔히 주변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애를 높여라, 너를 사랑해라. 너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들도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나를 사랑하라는 건 알겠는데,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건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오늘부터 사랑해야겠다' 마음먹어서 좋아할 순 없다. 이처럼 나를 사랑하라고 해서 당장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


곰곰이 이 말을 살펴보면 나를 사랑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쉬는 날에 아침 늦게 일어나고, 스마트폰으로 빈둥대다가 한껏 나른해지는 오후 3시쯤,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게  일주일, 그 반복되는 사이클 안에서 최고로 좋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별로 한 건 없는데 시간이 훅하고 지난 느낌? 분명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걸 했는데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회의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정말 자기애란 무엇일까?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되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되는 건데 왜 항상 끝에는 알지 못할 회의감이 드는 걸까?


이러던 찰나에 창문 너머로 집 밖에 있는 화단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봄이라 그런지 꽃이 굉장히 예쁘게 피었다. 그 화단을 지나다니던 사람들도 꽃이 뿜어대는 매력에 말로 표현을 안 할 뿐이지 한참을 쳐다보고 갔다. 꽃은 정말 다양한 종류가 있다. 꽃잎이 너무나도 예쁘고, 향기가 정말 좋은 꽃은 지나갈 때마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꽃잎은 정말 예쁘지만 악취가 나서 가까이 다가가면 실망하는 꽃들도 있다.


그러다 한 가지. 문득 깨달았다. 인생을 꽃으로 비유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나'라는 꽃에 물을 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나라는 꽃에 물을 주는 행동인 건지, 아니면 말라 비틀어버리게 하는 행동인 건지, 또는 향기를 좋게 하는 행동인 건지, 악취를 나게 하는 행동인 건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들은 나 자신을 가짜로 사랑하는 행위였음을. 나 자신이 좋다고 행동했던 일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분명 '나'라는 꽃을 시들게 하는 행동이었음을. 그러함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지 않고서야 내가 항상 하루 끝에 영문 모를 회의감이 들 리가 없다. 오늘 내 꽃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꽃잎은 가장 예쁘고, 향기도 가장 매력적인 향기가 날 수 있도록.






책 <모든 요일의 기록>을 읽고 나는 오늘을 좀 더 사랑하기로 했다. 모든 요일의 기록이 쌓여 나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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