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신입생 때 만났던 우리는 어느덧 30대에 접어들었다. (물론 나는 빠른 년생이라고 우기며 여전히 29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1년에 한두 번 만나면서 서로의 근황을 전한다. 어제의 술자리에서도 우리 중 한 명의 결혼을 알리는 자리였다.
어떻게 만났어?
신혼집은 어디다 구했어?
갑자기 결혼하는 거 보면 설마?
이미 다른 친구들에게 들었던 질문인 것처럼 능숙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이야기의 주제도 자연스레 다른 이들의 결혼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나이가 나이인만큼 주변에 너무 결혼식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부터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요즘 사람들 만나는 게 왜 이렇게 귀찮은지 모르겠어.
어차피 만나봐야 거기서 거기인데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아가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
그렇다고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어느 순간 내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들었던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화는 좋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대화가 모두 일률적으로 흐르는 건 아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사회자가 되어야 하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청중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청중인 경우가 있다. 이런 자리에서는 침묵만 흐르게 된다. 이때 우리는 굉장히 어색해한다.
좋은 대화는 좋은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지금 자리에서는 대화부터 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든 침묵을 깨기 위해 지금 생각나는 손쉬운 질문부터 던진다. 이런 질문들을 우리는 호구가 던지는 질문이라고 해서 호구조사라고 한다.
몇 살이세요?
어디 학교 출신이에요?
직장은 어디 다니시나요?
결혼하셨어요?
아이는 왜 안 낳으세요?
...
이런 내용은 어차피 계속 만나다 보면 상대가 먼저 언급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애초에 그런 질문들이 의미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상대에게 겨누었던 질문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호구 조사를 싫어하는 내가 상대에게 먼저 언급함으로써 같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관계를 간소화하는 인맥 다이어트를 넘어 쓰고 버리는 '티슈'처럼 가 유행하고 있다. 이들은 본인의 관심사나 취향에 따라서 만나서 즐긴 후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 또는 단톡 방에서 누군가 번개를 제안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내 의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피곤하든 안 피곤하든 바쁘든 안 바쁘든 일단 나오라고 한다. 강압적이다. 그러나 이런 번개 자리에서는 그냥 안 나가면 된다. 원할 때만 나가면 된다. 관심사나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다 보니 대화의 주제도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게임을 하는 번개였다면 게임에만, 독서모임이라면 책에 관한 내용에만 집중한다. 이런 관계에서는 내가 원할 때만 이용하면 되고, 원하지 않을 땐 뒤에서 관망하면 된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이 싫어서 모든 관계를 티슈 인맥으로 채울 수는 없다. 불편함을 회피한다고 해서 모든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불편함으로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낯선 사람과 말을 섞고 관계를 맺는 단계에서 우리는 매번 '스몰 토크'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달리 말해, 스몰 토크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말의 품격 中>
이기주 작가는 책 <말의 품격>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몰 토크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대의 조건보다 상대의 "요즘"에 관심을 갖는 태도는 스몰 토크의 시작이자 좋은 질문이 된다.
좋은 질문은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끊임없이 점검하고 고민해야 한다. 만약 그 질문을 내가 받는다면 기분이 나쁠까? 누군가 나에게 조건에 관한 질문을 한다면 기분이 나쁜데도 할 말이 없다는 핑계로 조건에 관한 질문을 너무 쉽게 상대에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면 느리더라도 개선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기분 어때?
상대가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못 사는지는 궁금하지만 그 상대가 어떤 기분인지는 정작 궁금해하지 않는다. 요즘 기분 어때? 지금은 괜찮다는 말과 말과 함께 그리고 고맙다고, 지금 이 질문 하나로 정말 괜찮아졌다고. <찌질한 인간 김경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