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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l 21. 2019

매일 아침 손님이 찾아온다.

회피하는 감정은 나를 대신해 위대한 존재로 남는다.

매일 아침 손님이 찾아온다. 어렸을 때는 새로운 손님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이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익숙한 손님만 받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잃어버린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한없이 커 보였던 선생님도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럼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는 건가요?'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불편함을 선사하는 손님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익숙함으로 점철된 삶은 의식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다고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새로운 손님의 방문이 드문 삶에서는 오늘 하루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런 날은 며칠만 지나도 어떤 특이점도 남지 않아 그 자체로 기억되지 못하고 더 큰 존재의 일부로 포함되어 희미하게 인식될 뿐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듯이 철학자는 익숙한 것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유난히 큰 돌을 던지는 철학자 강신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히 엇갈린다. 그런 그가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분류법을 본떠 48개의 감정을 고전 소설과 엮어 설명하는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2013)을 썼다. 팔리지 않기로 유명한 철학 분야에서 이 책은 35만 부가 넘게 나가면서 지난 10년간 철학책 중 가장 많이 팔렸다. 뒤따르는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플라톤), 『논어』(공자), 『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인 것만 봐도 이 시대에 그가 쓴 책의 메시지가 유효하다는 것임을 입증하는 셈이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 불이익으로 직결되기 쉬운 사회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는 징징대는 사람으로, 회사에서는 나약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오죽하면 단톡방에서도 이모티콘으로 현재의 심정을 대변할까. 그렇지만 책 『말그릇』(김윤나)에서 얘기했듯이 감정은 내다 버리는 쓰레기도 아니고, 금고에 고이 숨겨 두어야 할 금덩어리도 아니다. 고장 나면 고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틀고 멈추기를 반복해야 하는 생활필수품이다.


소피 그랑발, 「꽃 속에 둘러싸인 새」(1979) ⓒ The Birdman Art Library / EuroCreon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


나를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감정은 언제든 반길 일이지만, 불편함을 안겨다 주는 감정은 회피하기 바쁘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나를 대신해 위대한 존재로 남아있게 된다. 나타날 때마다 내 자리를 뺏고 주인공이 된 감정을 격하시키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부딪혀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분노, 질투, 절망, 반감, 경멸, 수치심 등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짜증'이라는 감정 하나로 귀결된다.


어떤 감정이 나를 격하시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경험해봐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삶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기에 다채롭지만은 않다. 그러니 소설을 읽을 수밖에. 무채색에 가까운 우리 삶을 대신해 소설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일어나고,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 판타지가 실현되면서 감정에 충실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절망은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에 더 위험한 감정이다.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 에서는 열아홉 번째 감정으로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책 『책 읽어주는 남자』 를 통해 절망(Desperatio)이라는 감정을 설명한다. 케이트 윈슬렛이 출연한 영화 「더 리더」(2008)의 원작이기도 하다.


(※아래부터는 소설과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어지럼증을 호소하면서 거리에서 구토를 하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스물한 살 연상의 한나가 그를 집에 데려가서 돌봐준다. 미하엘은 또래 여학생에게 느낄 수 없는 성숙한 여인의 매력 앞에서 어떤 저항도 할 수가 없다. 미하엘에게 여자를 가르쳐 준 한나는 ,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렇게 둘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말도 없이 사라진다.


9년이 지나고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학회 활동의 일환으로 참석한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서있는 한나를 목격한다. 한나는 나치를 도와준 정황이 보이는 보고서를 썼다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문맹인 그녀가 그 보고서를 썼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녀의 역린이었다. 오죽하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될 정도였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녀의 역린임을 알기에 선뜻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묵묵히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는 한줄기 빛도 없는 쓸쓸한 감옥살이를 하다가, 어느 날 미하엘이 보낸 카세트테이프를 받게 된다. 그 테이프는 소년 시절의 그가 자신의 옆에 누워 책을 읽어줬던 것처럼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한다. 희망이라고는 없었던 그녀는 그로 인해 많이 밝아지게 된다.  그 영향으로 감옥에서 열심히 글도 깨우쳐서 미하엘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는 그 편지를 무시한 채, 전처럼 계속해서 카세트테이프만 보낸다.


시간이 흘러, 한나의 출소일이 다가오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녀를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미하엘뿐이었다. 출소하기 며칠 전 둘은 몇십 년 만에 조우하게 된다. 한나는 함께 교감을 나눴던 행복한 시간만을 기억하고 있는 반면, 미하엘은 전혀 달랐다. 냉소적으로 그녀를 도와줄 뿐이었다. 오랜 수감 생활을 끝마치고 출소하는 날, 그녀는 책을 쌓아놓고 그 위로 올라가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 어떤 희망도 없었다면 그녀는 자살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미하엘이 심어준 희망이 있었기에 그녀가 느낀 절망의 감정은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미하엘은 한나가 왜 죽었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간 사람이 본인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는 소년일 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기에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 한나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에덴동산을 잃지 않기 위해 현재의 한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하엘 입장에서는 배려라고 했던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그녀를 절망이라는 감정을 통해 파멸로 이끌었다. 우리라고 다를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말, 또는 행동 하나가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 책 『데미안』, 헤르만 헤세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 을 읽고 평소 즐겨 읽지 않던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욕구는 평소에 쉽게 흘려보냈던 무수히 많은 감정을 읽고 싶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이 48개나 되는 감정의 존재를 알려줬다면, 각 감정에 소개된 소설을 읽는 건 그 감정을 터득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리디북스에서 고전소설 100권이 포함된 펭귄 클래식 세트를 구입했다. 이제 소설을 통해 감정을 읽을 시간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손님이 오든지 감사하게 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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