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재미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삶이 녹여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삶이 어디쯤에 위치해있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의 에세이일수록 그 내용이 더 흥미롭다. 때론 불안한 미래를 두고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확인받기 위해 읽고, 때론 따분한 삶에 긴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삶이 곧 도전이었던 사람을 책으로 만나며 변주되지 않는 삶에 긴장을 불어넣기도 한다.
어떤 에세이의 리뷰를 읽었다. 책을 좋아하면 공감 100%, 아이를 키우는데 책도 좋아하면 200%라고 했다. 너무 뻔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손은 이미 결제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온라인 서점 MD로 일하고 있는 김성광님의 책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였다. 책을 파는 회사라지만 좀처럼 책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업무를 쳐내고 집에 가면 정신없이 육아를 해야 하니 저자는 좀처럼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시간이 없다는 말이 짠하게 들린다.
코로나로 인해 약속도 없고 모임도 없는 요즘에는 시간이 한가할 정도로 여유롭다. 글 쓸 시간도 많고 책 읽을 시간도 많지만 당장 하지 않는다. 지금 하지 않아도 시간은 많기 때문에. 바인더에 적는 일정도 딱히 없다. 일주일이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저는 바인더에 쓸 정도로 일정이 많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 사람은 비슷한 환경에 놓여야만 상대를 공감할 수 있구나.
야근에 찌들어 집에 가서 바로 자야 다음 날이 피곤하지 않을 때 오히려 시간을 만들어냈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 카페에 가봐야 영업 마감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그 시간에 뭐라도 해보겠다고 매일 같이 흩어진 시간을 알뜰살뜰 모았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60분은 지금의 2~3시간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었다. 시간은 없었지만 회사에서도 회사 바깥에서도 '내 일'은 잘하고 싶었으니깐.
시간이 생긴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인더에 밀린 하루를 기록하거나, 틈틈이 적어놓은 글감에 살을 조금 더 붙여본다던가. 필사 몇 줄 쓰는 일이었다. 꼭 해내야만 할 일은 잠시 잊고 나에게 오롯하게 몰입하는 시간. 그 짧은 순간 덕분에 길었던 하루도 만족스럽게 끝난다.
서울 사람들은 어디서나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서울 생활 초기부터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면 늘 뭔가를 읽어왔고, 그 시간이 너무 흡족했다. 먼 데서 약속이 잡혀도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긴 시간을 누리게 된 것이니까.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책을 더 읽지 못해 아쉬웠다.
― 책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 김성광
업무와 육아로 인해 좀처럼 자신의 시간을 못 내지만, 유일하게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출퇴근길에서 책 읽는 게 좋다는 작가의 문장을 보며 시간은 없었지만 잘하고 싶었던 나의 예전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다시 힘을 내고 싶어졌다.
어느 하나에 집중해 대단히 잘할 때보다
어느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을 때 나는 행복하다
― 책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