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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Apr 25. 2021

내가 살아온 '집'이라는 역사

처음은 고시텔이었다. 면접 봤던 곳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고. 취업했다는 사실이 기쁘긴 했지만 '취업이 확정된 시간'에서 여유를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사담당자는 비슷하게 들어오는 동기들이 있기 때문에 기간을 같이 맞추면 좋겠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조금 더 늦게 입사할게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알았다고 했다. 다음 날 바로 인천에서 성남으로 집을 알아보러 갔다. 보증금도 부족할뿐더러 시간이 급하다고 덜컥 계약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2~3개월 정도 머무를만한 고시텔을 찾아 나섰다. 회사와 가까운 역에 위치한 고시텔 몇 개를 보러 다녔는데 다 별로였다.


이런 곳에 살아야 하나 싶었다. 조금 먼 역에 가니 그래도 괜찮은 고시텔이 있었다. 개인 화장실도 있었고 냉난방도 자유로웠다. 일반 시세보다는 비싼 곳이었지만 싸고 불만족스러운 곳보다 비싸도 만족스러운 곳이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7개월을 살았다. 금방 월세를 구하려고 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니 고시텔에 적응하기도 했고 매달 큰돈이 나가는 월세보다 이곳에 조금 더 있더라도 돈이 덜 드는 전세를 가기로 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퇴근 후 회사 근처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고시텔 알아보러 다닐 때랑 비슷했다. 가까운 곳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고 비쌌다. 그래서 조금씩 멀리 가보기도 했는데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초반에는 공인중개사무소에 가는 대신 직방이나 다방을 주로 이용했는데 내가 원하는 매물은 애초에 없거나 전세대출이 불가능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좋은 공인중개사분을 만나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좋은 매물이 있었다. 역에서 꽤 걸어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운동하는 셈 치자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고 나서 첫 회사를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정해놓지 않았다. 다시 인천 본가로 돌아갈까 하다가 전세라서 고정비용이 크게 들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성남이 살기 좋았다. (집에서 판교와 서현, 야탑이 한 정거장 차이였다.)


그렇게 성남에서만 5년 넘게 살았다. 직장을 다니며 절반을 살았고, 직장을 나와서 나머지 절반을 살았다. (직장을 다녔을 때보다 나와서 지냈던 성남의 기억이 더 좋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는 날 아침. 집을 정리하면서 내가 살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흔적이 하나 둘 보였다. 그 흔적들을 통해 다른 기억들을 꺼내 들었다. 그곳엔 자그마치 5년이라는 흔적이 깊게 배어있었다. 짐을 밖으로 다 꺼내고 나니 텅 빈 공간이 처음 이 곳에 이사 오던 기억을 꺼냈다. 빈 공간을 두고 핸드폰을 꺼내 아쉬움을 찍었다. 지금까지 다시 꺼내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는 한 번 열어보지 않을까.


탄천을 걸어 다니고 뒷산을 오르내리며 성남이라는 곳에 정이 들었던 나는 거처를 옮겨 지금 이곳에서는 성북천과 청계천을 오고 가며 조금씩 정을 붙이고 있다. 지도에서 이미 수없이 봤음에도 기억에 남지 않은 곳들이 발걸음이 한 번 찍히고 나면 오랜 시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곳이 어제보다 조금씩 넓어진다.


오래 산 곳을 떠나기 힘든 이유도 그곳에 처음 살았을 때보다 지금 훨씬 크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익숙한 장소에서 오는 정신적인 안정감도 그렇다.


지금은 원룸보다 조금 넓은 1.5룸에 살고 있다. 성남 원룸에 살았을 때는 '과연 지금보다 큰 공간으로 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있었기에 지금 있는 곳이 더없이 소중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다음에 가는 공간 또한 지금 있는 이 공간으로 인해 더 기쁘지 않을까?


키보드 위에서 주로 밥을 먹던 나는 이제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종종 영화를 보면서 키보드 앞에서 먹으려는 버릇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때마다 꼭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고 나서야 키보드 앞에 앉는다.


앞으로 더 큰 집을 가더라도 단언컨대 고시텔에서 살았던 7개월, 원룸에서 살았던 4년 넘는 시간이 기억이 내 남은 인생에서 소중한 기억으로 함께 살아갈 것 같다. 그곳에는 '내일 뭐 하지?' , '다음번엔 상황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등의 불안이 언제나 함께 있었다.


어제의 불안은 나를 좀먹었지만, 오늘의 막연한 희망 덕에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과거는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재해석의 기준은 현재다. 현재 성공한 상태라면 과거의 고생은 빛나는 훈장으로 해석되지만, 고생스럽던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것은 지긋지긋한 불행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책 <돈 일하게 하라> 중에서


불안했던, 불행했던 과거가 '고생스럽게만' 느껴진다면 과거는 그저 숨기고 싶은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들어준 빛나는 훈장과도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 고생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불안하고, 불행하다 생각할지라도 계속 느끼고 기록하라. 훗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졌을 때 그때 남겨둔 기록이 당신의 훈장이 될 테니까. 스스로 선사한 빛나는 훈장이 많은 삶이라면 앞으로의 인생 또한 든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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