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P군과 나의 이야기(2)

지금도, 앞으로도

by 모닥불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말이 빨리 지나가 월요일이 되기를 바랐다.

무슨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그가 입원해 있는 00대학교병원을 P의 고향 친구와 함께 찾아갔다. 응급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고, 하루 한 번, 가족 한 명만 면회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담당 간호사를 호출하여 현재 상태를 물어보았다.

C에게 들은 얘기와 일맥상통하였다.

추가로 듣게 된 정보는, 그가 상태가 악화되어 00대학교병원으로 실려와 의사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24시간 내에 수술하지 못하면 사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는 사실이었다.

왜 주말에는 뇌파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인지 묻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저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 숙여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내부 사정이 있을 것이고, 내가 다가가지도 못하는 P를 직접 케어하는 것

은 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심슨처럼 노랗게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를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 관장을 시켜주고, 수치를 확인해 주는 그들에게 P의 이모님은 커피와 간식을 날랐다.

친구에게 미리 들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 급박한 상황을 담당자에게 직접 들으니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눈앞에 닫힌 응급 중환자실의 문 건너편에 그가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주말 동안은 P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들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이게

된 것이었다.

여러모로 괴로웠다. 특히 P가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어 의식을 찾게 되길 바라는 만큼,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의 뇌파가 완전히 흐르지 않아 뇌사자 판정이 확정되길 바라야 했기 때문이다.

끔찍한 주말이 지나가고, 어느덧 월요일이 되었다. 힘들어하는 내게, C는 모든 상황이 잘 풀렸을 때 네가 P의 면회를 간다던가 하는 이유로 자리를 비우려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일 뿐일 때 너의 생활을 잘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출근을 강행하였다. 근무를 하는 내내 휴대폰으로 시선이 갔다.

지금쯤이면 뇌파 검사를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이모님께 연락이 왔다.

수술이 결정되어 화요일 오후에 바로 수술을 진행한다고 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간 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목놓아 울었으면서, 그 수술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P가 수술을 한 지 약 세 달이 지났다. 수술을 한 지 4일이 지나서야 그는 눈을 떴으며, 눈을 떴을 때는 2주 동안 꼼짝없이 누워있었던 상태였다.

4월이 된 현재는 밖을 나서면 겉으로는 그가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정도로 회복하였다.

수술 후 병원 복도 한 바퀴를 천천히 도는 것도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던 P는 현재 운전도 하고 육천 보 정도는 걸어도 멀쩡하다.

그가 수술을 하게 된 후에 개인적으로 걱정했던 점은 그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전지적 P 시점에서는, 숙취 때문에 입원하게 된 후에 갑작스레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그 후 눈을 떠보니 본인도 모르게 간 이식 수술이 진행되었고 그 후 배에 남겨진 커다란 흉터와 달라진 삶을 바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해서 정신과 진료를 연결해 주는 경우가 많다고 듣기도 했다.

5년을 사귀었지만 P와 정말 죽도록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다른 점에 끌려 만나 그 다른 점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다.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 그는 소위 mbti의 T 적인 요소가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감정적 공감을 하며 타인의 사정에 안타까워할 때, “그래도 견뎌야지. 그래도 해야지.” 같은 대답을 하는 그였다.

5년을 만나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음에도, 이번 일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깨어났을 때 그가 큰 충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가 눈을 뜬 후의 상황도 걱정이 되었다.

수술 이후 처음 면회가 허락되었던 그날, 1인실 병실에 누워서 나를 반기는 그를 보자마자 눈

물이 수돗물을 튼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나에게 그가 남긴 첫 마디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 살았는데 왜 울어."


그를 참 많이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고비를 넘긴 만큼 아무 감흥도 없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참 본인의 일에 초연해 보였다.

이건 뭐, 옆 동네 아무개의 사돈의 팔촌이 죽을 위기였는데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살아서 다행이네.” 대답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으니.

처음에는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세 달을 지켜본 결과, 그는 환자로서 완벽한 자질을 갖춘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로지 치료와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또 하나, 간 이식을 받은 사람은 장애인 등록이 가능하다. 부끄럽지만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에

게는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나와는 큰 관계가 없는 단어로 느껴졌었다. 공익으로 근무하며 장애인들을 돌보던 남동생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누나, 장애인이란 거 정말 별거 아니야. 우리가 어쩌다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 한마디만 잘려도 그냥 장애인이야. 누구나 갑자기 될 수 있어."

이번에도 나는 방심을 했더랬다. 모두가 유약한 나 같진 않은 거겠지.

P는 장애인 등록을 위해 서류를 준비했다며 말미에 나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나, 장애인이 되어볼까나.’



큰 고비를 넘긴 것은 사실이나, 냉정히 말하면 이제야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20대인 나는 죽음을 생각하기엔 멀었다며 어찌나 안일했는지.

내가 아닌 타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죽음이란 것은 나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왔다.

근방의 의사들이 모여들어 협진을 할 만큼 원인불명의 큰 병이 나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불행한 와중에도 한시가 급한 큰 병을 젊은 나이에 안은 덕분에 뇌사기증자에게 간 이식

을 받을 수 있는 1순위가 되어, 똑같이 소중한 목숨들을 제치고 수혜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생각이 날 때마다 P를 포함하여 5명을 살리고 떠난 그분에게 기도를 드린다.

그저 기도가 닿길 바랄 뿐이다.

나는 P처럼 주어진 상황을 좀 더 초연하게, P는 나처럼 익명의 기증자에게 좀 더 감사하며,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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