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곁에 남는다는 것
P의 인생에서의 변화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변한 점들이 있다. 천천히 그 얘기를 해보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P가 의식불명이 되어 나는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24년 1월,
친구 C의 조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노력했다.
열심히 출근하는 것.
내 직장의 장점은 일찍 출근하여 시간을 채운 만큼, 차후 일찍 퇴근하는 식으로 시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범위는 한달 단위였기 때문에 아침7시에 출근 후 정시퇴근하는 방식으로 하루에 10시간 정도 근무하며
혹시 존재할지 모를 병문안을 위해 시간을 채워나갔다.
사실 그렇게 잘 해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은 출근한지 2시간 만에 몸이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조퇴를 해버렸다. 마음을 다잡아 보려 해도 자꾸 모니터가 흐려지고 집중이 되지 않아서였다.
상태가 여간 이상해 보인 것이 아니었는지 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 다들 내 안부를 물어보았고,
평소 잘 지내던 모 선배에게 끅끅대며 휴게실에서 사실을 털어놔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민폐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와중 다행인 것은 그 당시 1월 나의 업무는 굉장히 여유가 있는 편이었어서 업무적으로 피해를 주진 않았다. 업무 분장이 뚜렷하여 각자 할 일만 하는 부서였던 점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기적적인 수술이 진행되고 그가 얼른 회복되길 기다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상통화였다.
의식이 돌아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환자실에서 케어를 받던 그를 찾아갈 수도 없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날이었다.
화면 속엔 온갖 줄을 꽂고 산소호흡기를 낀 채 무어라 소리를 내는 그가 있었고, 5분 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P의 어머니께서 전화연결을 해주신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대화를 나눈 후,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힘이 풀려 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에게 한동안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1시간의 연락가능한 시간 중 나를 위해 마지막5분을 쓴 것에 서운한 감정이 들었는데 이는 내 오해였다.
그는 의식을 되찾고 어머니와 면회가 되자마자 나에게 연락을 해야한다고 말하였고,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무 중이었던 나는 업무전화로 한동안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하여 그 사이 다른 가족들, 지인들에게 그 기회가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물론 반드시 1인실을 써야하고, 감염의 위험이 있어 비닐옷, 마스크, 비닐장갑을 끼고 소지품 없이 한 명씩만 면회가 가능하였다.
면회가 가능하자마자 참 열심히도 출근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그는 중환자실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된 몸으로, 이렇게 자주 면회를 오면 환자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고 간호사께 제지를 받았다. 바로 수긍하여 알겠다고 한 후 돌아섰지만 돌아서자마자 또 눈물이 났다.
P 또한 안그래도 지루한 병실에 면회도 안되냐며 툴툴거렸지만 내 욕심으로 그에게 피해가 가는 건 싫었다.
그 후론 경과를 기다리며 상태가 좋아져 괜찮다는 말을 전해듣고 면회를 갔다.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수술 후 다시 눈을 떠 몸을 움직인 기간이 족히 2주는 됐으므로,
그 동안 그는 다 빠져버린 근육 탓에 재활을 해야했다.
일반병실의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가는 식으로 운동시간을 가졌는데,
맨 처음 그는 복도의 반바퀴를 걷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들어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거칠어지며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엔 한 바퀴를 돌고는 그만하고싶다며 떼를 썼던 그였지만, 20대의 체력 답게 금세 몇 바퀴를 거뜬히 걸었다.
입원 중 갑작스레 투석을 하는 등 또 한번씩 내 심장을 철렁 내려앉힌 그였지만, 회복은 매우 순조로웠다.
그렇게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에 점점 현실이란 것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