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개발자 한 사람이 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저 빡쳐서 나가기로 했습니다."
"네?"
"아니 무슨 프로젝트 관리도 안되고 동시에 몇 개를 해야되는지 모르겠어요. 이거 하다보면 저거 해야되고 또 다른 것들도 챙겨야 돼요. 그러면서 자꾸 개발일정이나 납품일정은 맞추랍니다. 대체 제가 뭘 어떻게 해야되는 걸까요."
당장 돈을 만들어 내야 버텨가는 소기업이니 이것 저것 되는 대로 일을 잡아와야 한다는 것은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하드웨어 개발자처럼 동시에 여러 가지 (하청) 납품 건들을 처리하면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력을 늘려주던가, 아니면 따오는 일들이 좀 일관성, 연계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좀 나을 것 같아요.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지만 이건 대놓고 야근을 요구하는 수준 아닐까요." 그 하드웨어 개발자의 말이다.
가끔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갈 일이 있다. 시간도 애매하고 그 부근에 무슨 맛집이 있는지도 모르니 결국 터미널 앞에 있는 식당에 들르게 된다. 이런 식당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메뉴가 엄청 많다는 것이다. 선택장애가 올 정도로.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그 맛 없음에 실망하며 '그래, 어차피 맛을 기대한게 아니라 배만 부르면 됐지'하며 현실을 합리화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이 회사에 서비스든 솔루션이든 제품이든 납품을 의뢰한 고객사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이것 저것 맡겨만 주시면 잘 해드리겠습니다'는 버스터미널 앞 식당과도 같은 말을 듣고 일을 맡긴다. 결과물을 받으면 '만족하진 못하는데 그럭저럭 쓸 수는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다.
정말 유명해서 줄 서 기다리며 찾아가는 맛집은 메뉴의 숫자가 적다. 극단적인 곳은 메뉴 하나만 걸어놓고 영업한다. 그럼에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앞서 언급한 하드웨어 개발자가 떠나기 전 조심히 물어봤다.
"솔직히... 우리가 가진 기술이라는게 대단한건가요? 남들이 못 가진 건가요? 다른 곳과 차별성이 있나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뭣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