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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23. 2015

제철 과일만큼, 제철 공기를

이미 주어진 것들을 누리는 자유롭고 기분좋은 하루​

일러스트  ⓒ황인정



교회에서 매년 열리는 운동회를 다녀온 다음날에는 한 것 없이 온 몸이 쑤신다. 예전에는 운동장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파랗고 높은 하늘 뿐이었는데 이제는 운동장의 모래 바람이 먼저 느껴져서 조금 슬프지만 가을의 하늘 높이 걸린 만국기 아래서의 운동회는 여전히 즐겁다. 요리조리 피해 다녔던 몇 년과 달리 올 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짝이 되어 2인 3각도 하고, 엄마가 함께 오지 못한 4살 아이와 엄마 대신 힘껏 달리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친적집에 왔다 따라온 케일리는 줄다리기를 함께 하다가 백여명이 벌이는 힘싸움에 빨갛게 된 손바닥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50이 넘어서도 날쌔게 달리는 남자들 덕분에 이어달리기는 여전히 긴장감 넘쳤으며, 점심을 먹었는데도 과일을 먹고 과자를 먹고 나눠주는 떡을 먹고 보이는 대로 집어먹고 다니게 되는 운동회는 언제나와 같았다.   


운동회의 마지막엔 항상 경품을 뽑아 상품을 주는데, 가장 인기있는 것은 언제나 자전거이다. 아이들이나, 학생들이나, 청년들이나, 어른들까지도 대여섯대 있는 자전거만 바라보고 있다. 항상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던 자전거들이 점점 다양한 모양을 하고있다.


자전거, 라고 해도 각자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비를 빈틈없이 갖추고 헬멧을 쓰고 달리는 자전거, 아이들이 술을 달고 기우뚱거리는 조금은 조잡스러운 핑크색 세발자전거, 일본 골목에서 타고 다닐것 같은 바구니를 단 순수한 베이지색 자전거, 남자 중학생의 거침없이 주택가 사이를 누비는 검정색 자전거-


귀엽고 모던한 디자인의 자전거에 당첨된 후배 하나는 자전거에 당첨되자 환호했지만 막상 집에 갈 때가 되자 이 자전거를 어떻게 가지고 가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전거자체보다는 페달을 밟고 뛰어서는 갈 수 없는 속도로 한순간에 달려나가는 자전거가 주는 상쾌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가진 것에 환호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거추장스럽게 집 한쪽에 놓아둘지 몰라도 언제라도 밀고 나갈 순간을 얻을 수 있다는 안도감. 자동차처럼 유지하는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닌 온전히 나 하나 달려가는데 필요한 바퀴 두개.   


얼마전 전철을 타고 나가는데 내가 선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요즘 유행하는 휴대폰 게임을 하는지 전부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에 조금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다. 심지어 내려서 승강장을 걸을 때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부딪히지 않게 걷느라 다들 요령 좋게 하지만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오고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철역의 공기가 각이 져 빡빡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뻣뻣하고 불편해졌다. 아무도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고 걷지 않는 곳에서 휴대폰 없이 두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오히려 낯설게 내 눈에 띄는 것이 의아한 저녁 시간의 전철역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가는 저사람 비켜가세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예전에는 자전거만 지나가도 눈을 크게 떠야 하는 세상이었는데, 이제는 차도를 지나갈 때조차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손에 든 휴대폰만 보고 걷는 세상이 되었다.  


따르릉 따르릉 조심하세요  

저기가는 저사람 조심하세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가을도, 파랗고 높은 하늘도,

우물쭈물 하다가는 지나갑니다.  


올해도 나는 추첨에서 자전거는 커녕 수저하나 뽑지 못했지만, 충분히 기분 좋은 하루였다. 제철과일만큼이나 잘 익은 이 가을의 '제철공기'를 잔뜩 마시는 것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굳이 경품으로 뽑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것들을 누리는 자유롭고 기분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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