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음식에 대하여
정수복씨의 글을 읽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 나왔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면 토마토와 박하, 생선과 회향, 닭고기와 타라곤, 양고기와 로즈마리, 토끼고기와 백리향, 치즈와 차조기가 서로 짝을 이룬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가서 지내다 보면 사화학자가 쓰는 문장조차도 아름다워 지나보다. 박하, 백리향, 타라곤 같은 이국적인 단어들이 나오면서 문장에서 허브 냄새가나는 것 같다. 이렇다할 수식어 없이 음식의 재료들만 나열했을 뿐인데도 미스트랄이 부는 전원의 마을의 식재료를 맛본 것 같이 단어들이 입안을 맴돈다.
회향은 뭘까, 타라곤은, 백리향은?박하, 사탕의 박하일까, 과일인지 채소인지도 알 수없다. 회향은 오히려 영어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는 식물일까 싶다. 식물도감이라도 펼쳐놔야 생김새나 쓰임을 알겠지마는 찾아보지 않은채, 문장을 음미하고 냄새와 맛을 상상해본다.
어제 밤 텔레비젼에서는 외국에서 공부한 유명한 요리사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지방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술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떠났다가도 결국 우리의 것을 소개하고 싶어져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들 왜 우리 것이 맛도,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꾸만 먼나라의 음식에 매료되어 떠나는 것일까?
더구나 요즘은 "푸드 마일"이라고 해서 먼 곳에서 방부처리되어 온 것 보다 그 지역의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건강에 좋다고 여겨지고 있는데다, 나도 국산이라는 표시에 몇 천원을 기꺼이 더 지불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런 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낯선것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인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상통하는 것. 그런류의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등장하는 낯선 이름, 신데렐라가 신었다는 유리구두,
세상에 있다지만 본적 없는 것들과 발음해본 적없는 재료의 단어를 발음할 때의 설레임, 약간의 흥분감과 기대, 그리고 상상이 되지 않는 타국의 음식에 대해 입에 넣을때까지도 미지의 세계인 그 곳으로 가고 싶은 갈망 때문일 것이다.
“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윤동주 시인조차 이국의 낯선 이름들을 소리내어 불러보며 '아름다운 말 한마디'라고 말한다. 소학교라고 부르는 시대에서 프란시스 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머니 아버지 대에, 팝송이나 외국의 시를 외우는 것이 낭만이고 멋쟁이였던 것처럼 어느 시대나, 심지어 우리나라 노래에 전세계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 시대에서조차, 우리는 낯선 것을 동경한다.
가수 김완선 씨의 "리듬속의 그 춤을" 라는 노래를 다른 가수가 편곡해 부르는 공연을 보면서 나는 다른 것보다 "현대 음율 속에서- " 라는 가사에 '아니, 그 시대에 이런 멋진 가사를!' 하고 감탄했는데( 요 며칠 그 부분만 반복해서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그 가사가 신선하게 들리는 이유는 아마도 사용하고 싶은 영어 단어를 번역체그대로 사용해서일 듯 싶다. 요즘이야 직역한 그대로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된 노래의 가사나, 문학작품에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먼저 낯선 것을 맛본 사람들이 소리내어 읽어서 만들어진 단어들(그래서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발음되는)이 등장하면 약간 촌스럽고 어색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눈에 띈다.
넣는 재료는 더 적을지라도 일본식 카레, 라고 부르면 특별한 하나의 메뉴가 되고, 떡볶이 소스에 버무린 만두튀김위에 바질만 얹고도 타국의 음식인양 담아내는 나는 오늘 저녁, 어느 사회학자가 쓴 문장을 씹으며 토마토와 박하, 생선과 회향이 어떻게 어울릴지 상상하며 프로방스를 여행하고 있다.윤동주 시인처럼 아름다운 그 재료들을 소리내어 불러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