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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23. 2015

카모마일 티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계절 ​

일러스트 ⓒ황인정




나는 카모마일 티백이 10개 들어있는 박스를 카트안에 던져 넣었다.
루이보스 카모마일, 잉글리쉬블랙퍼스트, 다 멋지게 들리는 이름이었다. 카모마일 밑에 써있는 심신의 안정, 숙면 이라는 효능도 그 이국적인 이름에 걸맞게 그럴듯하게 들린다.
난방을 해야 할 만큼 추운건 아니지만 몸도 마음도 조금 서늘해진 요즘이라, 밤에 마시고 자야지, 커다란 머그잔에 가득 우려서 마셔야지, 라고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곧 해야 할 이사 때문인지, 긴 팔옷을 입기 시작해서인지 남편도 마음이 싱숭생숭 한지,
커피 말고는 마실 거 없나, 라고 마침 물어서, 보란 듯이 머그잔 가득 차를 만들어왔는데 박카스 같은 노란 색깔이 수상하다며 의심을 한다. 마시는 내내 이렇다 할 맛이 없는 차를 두고 원래 이런 맛이 맞는 거냐고 묻다가는 결국 남은 콜라를 마시겠다고 콜라를 찾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쌀쌀하잖아- 따뜻하게 이거 마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도 꽤 쌀쌀해졌다고 생각하는지, 다시 옆에 앉아 한 모금 한 모금 마신다.
맛이라곤 따뜻한 맛이 전부인 차가 좋은 것은 가을이기 때문일까.



...
정말, 가을이라서 일까,
…..서른 둘이어서는 아닐까,,,    
커다란 티셔츠만 하나 걸치고 자다가 순간 발이 싸늘해져 옆에 누운 사람의 발에 문질러 발을 데운다. 전해지는 온기에 안도한다. 서른 둘이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문지르자 조금 데워진 두 발. 아직 겨울은 아니다. 카모마일 티를 잔뜩 마셨는데,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추워진 만큼 온기를 그리워한다. 옆에 있는 사람을 더 많이 찾고, 더 가까이 앉고, 나에게 여전히 호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려 든다. SNS에 올라오는 비슷비슷한 일상에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을까 경멸하다가도(어쩌면 그런 비슷비슷한 일상마저 가지지 못한 나를 경멸하다가)
다들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일어나면 스마트 폰부터 열어본다. 2년 넘게 와서 글을 썼던 스타벅스는 폐점하는 지, 어제 오늘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사진을 찍고 도면을 본다. 한쪽에서는 짐을 싼다. 내 쪽에서 짐을 싸서 손 흔들고 가는 것은 그렇게 홀가분해 하면서, 사람도 아닌 카페가 이사 준비를 하는 것에 서운해진다.
정말, 가을이라서,,, 일까.   

김연수씨가 연재하는 산문 "소설가의 일"을 읽는데, <마쿠라소노시>라는 수필집의 문장을 옮겨놓았더라. 문단의 앞부분에 각각 적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단어 중에서도 가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을 부분부터 읽었다.

 

가을은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 둥지를 향해서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을 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풍경은 한층 더 정취가 있다. 해가 진 후 바람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가을의 석양 때문일 것이다. 바람소리와 벌레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가을이기 때문이다. 밤 늦게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 여름의 밤이 이어지다 순간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면서 여러 가지 해프닝으로 가득 찼던, 혹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일어난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워, 보이고 들리는 것에 쉽게 흔들리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방법을 꼽아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맨발을 부벼대면서 나는 브라우닝의 시를 마음에 담아 옆의 사람의 가슴속으로 더 파고든다.

춥다, 그러면서 파고든다. 이미 잠든 사람에게.
옆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나 열렬히 사랑하는 동시에, 아무도 채울 수 없는 답답하고 고독한 마음으로 별안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외로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심신의 안정’과 ‘숙면’을 위한 카모마일 차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가을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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