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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18. 2015

자정을 넘어, 티라미수

케이크만 있으면 특별한 날이 된다

일러스트 황인정



새벽 12시 반.
토요일 오후에 놀러 온 커플이 사온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다 먹었다. 3일에 걸쳐 케이크를 먹었다. 종류가 다른 조각 8개짜리.

방부제가 없으니까 빨리 먹어야 해요, 라는 말에 열심히 먹기도 했지만 한 조각 한 조각이 맛이 좋아서 그런 말을 듣지 않았어도 충분히 다 먹었을 것 같다.

항상 케이크는 처음의 흥분과는 다르게 다 먹지 못하고 질려서 남은 것을 밀폐 용기에 담았다가 결국 버리고 말았는데, 이번엔 마지막 조각을 먹고 나니, 아쉬울 뿐이다.

처음 4조각은 네 사람이 함께 먹었다. 내가 고른 것은 “초콜릿 치즈 케이크”. 화이트 초콜릿 조각이 보드랍고 달콤한 아이보리 색을 하고서 낙엽처럼 케이크 위에 얹혀져 있다.

치즈 밑부분의 오래오 쿠키가 씁쓸한 듯 달아서 화이트 초콜릿부터 바닥까지 포크가 닿도록 세로로 잘라 떠 넣으면 부드럽고도 진한 맛이 한 번에 혀에 닿는다. 미식가라도 된 기분이다. 느끼하지 않은 고급스러운 맛에 진심으로 맛있네요, 하고 감탄하자 케이크를 들고 온 커플도 뿌듯한 듯 말한다.

일산에 있는 라리, 라는 가게까지 가서 사온 거예요. 제빵을 공부하는 회사 직원의 남자친구가 추천해줘서요. 회사 직원의 남자친구까지 등장했는데, 아! 거기~라고 맞장구 쳐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유명한 집인 듯하다. 상자를 열면서 모두가 와아-, 라고 외칠 정도로 예쁘고 다양한 8개의 조각. 무엇을 먹어야 할까, 고르는 것마저 화제가 되었다.

같은 반찬을 차렸어도 케이크만 있으면 특별한 날이 된다.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어져도 둘이서는 다 먹지 못하니 살 수 없다. 조각케이크를 사자니, 크기는 작고 비싸다. 아쉬운 대로 빵을 하나 사서 먹는다. 남기더라도 특별하게 축하할 일이 있어 산 케이크는 정당하다.

그래서 케이크는 그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조잡한 장식들을 올린 케이크들이 진열된 것을 보면서 억지로 행복해지고 싶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늘어놓은 것 같은 위화감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는 한 입도 제대로 먹기 힘든 설탕 덩어리로 만든 것을 올려 놓은 것을 보면 그 솜씨에 귀엽다, 라고 순간 생각하지만 그 끝은 허망한 설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환호성이 단단하지 않다.

차라리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올려 있는 것이나 타르트, 치즈 케이크를 점점 더 선호하게 된다. 딸기 한 조각이라도 알차고 단단하게 여문 것으로 올려 있어야 완전한 케이크라고 생각한다. 존재 자체로 특별한 케이크니까요.

나머지 4조각을 이틀에 걸쳐 두 조각씩(어제는 놀러 온 동생과 내가) 먹었다. 마지막 조각을 먹으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낮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감정들이 밤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해서 곧잘 심각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요즘 주제는 계약 기간이 만료된 집을 떠나 어디로 이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조금 답답한 상황에 막혔다고 느끼는 남편은 이사를 하면서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이 리셋 되는 것처럼 새롭게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아, 빨리 이사 가고 싶다.”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인생이 마치 이 조각 케이크 같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일본에서 2년, 돌아와서 부모님과 일년 반,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2년, 그리고 이제 우리가 떠날 전혀 알지 못하는 지역에서의 몇 년이, 마치 초콜릿 치즈 옆에 오렌지 타르트, 그 옆에는 체리 타르트, 처음 보는 크레페 케이크(전병 사이에 커스타드 크림이 들어있다) 그리고 티라미수 조각 같았다.알고 있던 맛도 있고 처음 먹어보는 것도 있는 것도 있는,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조각조각 다른 케이크. 우리 둘의 인생이 이 조각 케이크라고 한다면, 케이크는 몇 조각이나 될까, 어떤 것이 얼마나 큰지, 어떤 맛을 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한 세 조각이나 먹어봤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고 이렇게 두근거리는 건 자정이 넘어서 티라미수를 먹어서인가? 다음 번 조각이 더 맛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섭기 보다는 두근거린다. 티라미수의 커피 맛처럼 잠 못 들 정도로 심장을 뛰게 하는 맛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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