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보로봉 Feb 19. 2016

감자와 양파. 겨울의 종료를 선언

 또 감자와 양파를 사서 끓이겠지만.  또 우리는 싸우겠지만.​

일러스트 ⓒ 황인정



당신의 나의 버터, 아니 마가린이라고 고백한지가 얼마전인데

어제는 울고 불고 나중에는 너무 울어서 무엇때문에 싸웠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정도로 다퉜다.

지금에야 "다퉜다" 라고 하지만, 자동차키를 들고 뛰어나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타고서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이야기가 통하지않아,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아. 문제의 본질보다는 서로가 아프라고 던진 말들에 아파서 차 안에 꼼짝않고 앉아 울었다.

따라 내려온 남편과 지칠만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를 풀다가도 다시 화를 내고, 체념하고, 그러다가 이해하는, 길고 긴 시간을 거쳐서야, 그리고 결국 지쳐 잠이 들어 몇시간이고 자고 일어난 아침이 되어서야 어제의 일이 까마득한 옛날의 일같이 느껴졌다.  


밤은 지나고, 커튼을 치면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아침이다.

순대국을 함께 먹으러 갔다.

깍두기가 맛있어? 라고 물으며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놓는 내 앞의 사람을 어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바람은 그렇게 추웠던 며칠전과는 전혀 다르게부드러워져서, 발끝까지 검정인 내 옷차림을 갑자기 칙칙하게 보이게 했다.  


언제 그랬냐는듯 성격 좋아진 봄날의 날씨.  


장을 보고 냉장고를 여니 감자가 한 알 남았다. 겨울 내내 감자와 양파를 참 많이 먹었다.

마트를 여러번 돌아도 우유와 달걀을 사고 나면 뭘 사야할지 몰라 난처한데다

겨울이라 푸른 채소는 너무 비싸기도 해서 다음에 사야지, 하고 미루니까 결국 남는 것은 감자, 양파, 두부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감자와 양파는 저장음식이라 미리 사두고 조금 잊어버리고 있어도 괜찮다.

콩나물이나 두부는 며칠 신경 못쓰면 유통기한이 쉽게 넘어가버려서 먹기도, 버리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감자는 싹이난 부분은 잘라내버리면 되고, 그 존재를 며칠씩 까맣게 잊고 있어도 너그럽게 기다려준다.   


감자 1개와 양파 반개를 자박하게 잠기도록 물을 붓고 끓인다.  

일단 그 둘을 끓이면서 집에 있는 재료를 살핀다. 스팸이나 버섯이 있으면 그것은 카레가 되고, 호박이나 두부가 있으면 그것은 된장찌개가 된다. 나중에 넣는 것들은 조금만 가열해도 금방 익으니까 가끔은 일단 감자와 양파를 불에 올려놓고 결정하기도 한다. 고기 육수와는 다르게 맑게 끓고 있는 감자와 양파의 냄새가 달고 고소하다. 양념을 넣기전 야채만 볶을 때 색깔이 변하면서 나는 한풀꺽인 달콤한 냄새와 사촌지간쯤 되는 채소의 냄새가 주방에 가득하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 거실의 차가운 공기를 이렇게 데우며 겨울을 났다.


봄이 오는 구나.

봄동이나 새싹도 먹긴 먹었지만 이 감자와 양파를 먹고 드라이할 겨울 코트를 세탁소에 보내고서

나는 겨울을 정리해 보내기로 했다.

어제의 차가웠던 그의 말들도.


혹시나, 내일 비가 오고 다시 또 추워지더라도 이제는 봄이다.

또 감자와 양파를 사서 끓이겠지만, 또 우리는 싸우겠지만,

내가 마지막 "겨울감자"로 명명한 감자를 다 먹었으니, 공식적으로 겨울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명란젓 같은거,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