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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04. 2015

여름의 복숭아

음식을 통해 떠올리는 소소한 기억

일러스트 ⓒ황인정

해가 내리쬔다. 

나는 강화도의 동막 해수욕장에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간 시골의 한적한 곳에 있는 한 펜션의 예약한 2층 방 베란다에 서 있다. 어제 도착한 이 곳은 동막 해수욕장과 달리 주위가 펜션으로 북적이지도 않고 바닷가까지는 계속 고구마 밭만이 이어진다. 눈을 뜨기 힘든 만큼 햇살이 강하지만 도시보다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스팔트에서 데워진 공기가 아니라 흙에서 식혀져서 고구마 밭의 초록색 넝쿨들을 지나온 바람이라 그런지 시원하고 청량하다.  

수영을 좀 해야겠다. 수영모자와 물안경을 챙기는 엄마와 달리 나는 페트병에 들어있는 옥수수차와 수건, 그리고 복숭아를 챙겼다. 

체리 말고 복숭아를. 

어제 휴가를 떠난다고 잔뜩 장을 보면서 큰 맘먹고 체리를 카트에 넣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거봉을 담았기 때문에 비싼 과일 종류는 더 이상 담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지만 놀러 가니까! 라고 누구에게 변명하는지 혼잣말을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체리 한 팩을 담았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가서 먹을 바비큐 고기보다 잔뜩 담겨있는 과일들에 들떠서 휴가를 시작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체리인데도 나는 수영장에 내려가면서 엄마가 싸온 복숭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수영장, 내리 쬐는 햇볕, 휴가,,,라면 역시 복숭아다. 수박은 다같이 둘러 앉아 먹는 과일이니까 방에 돌아가서 다같이 올림픽 경기를 볼 때 썰어낼 것이다. 지금은 우선 수영을 하고 나와 벤치에 누워서 방울 방울 맺힌 몸의 수분까지도 깨끗이 증발시켜버리는 볕을 즐기며 복숭아를 먹을 것이다. 딱딱하지 않아 손톱으로 껍질을 잡아 당기면 주-욱 벗겨질 정도로 잘 익은 분홍색의 복숭아. 초여름은 아니고, 한여름에나 어울리는 혼자 먹는 과일.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 복숭아는 혼자 먹는 과일이라고.

<홀리 가든>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마지막 남은 복숭아였다.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하얀 피부가 군데군데 물러서 갈색으로 변했지만, 껍질을 벗겨내자 과즙도 넉넉하고 잘 익은 속살이 달짝지근한 향내를 사방에 풍겼다. 투 스트라이크에 투 볼에서, 투수가 두 팔을 쫙 뻗고 휘두른다. 가호는 버터 나이프에 날이 붙어있는 것처럼 조그만 칼로 복숭아를 한 조각 잘라내 고개를 살짝 쳐들고 입에 넣는다. (..중략..) 가호는 복숭아 물 때문에 끈끈한 손으로 박수를 쳤다.”   
<홀리가든> 


이 장면을 읽으며 혼자 야구경기를 보는 가호가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달짝지근한 향내를 사방에 풍기는 과즙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를 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부터 잘 익은 복숭아는 혼자 먹는 과일이라고 줄곧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끈끈해진 손은 일부러 닦지 않고 볕에 말리면서 한여름을 즐기는 것이다. 수영장의 파란 물, 새하얀 구름, 그리고 바다까지 이어진 초록색 고구마 넝쿨을 타고 흐르는 나의 여름이 복숭아와 함께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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