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우리는 당장의 갈증과 배고픔 때문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한다
더워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면 차가워서 세 모금도 못 마시고 역시 따듯한 걸 시킬걸, 하고 후회한다. 항상 그런다, 항상.
하지만 더운 여름 커피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단 떠오르는 것은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음료 한 모금. 줄을 서서 주문할 때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아이스! 를 외치고 만다. 항상 후회하면서, 금붕어도 아니고 매번 바로 앞만 본다. 얼음물 한잔을 따로 받는 방법도 있건만. 역시 금붕어인가 여름 앞에서 나는.
성경에는 ‘야곱과 에서’라는 형제의 일화가 있다. 쌍둥이지만 형인 에서는 급한 성격에 털이 수북해서는 사냥을 잘하는 오늘날의 상남자고, 동생은 엄마와 집에서 요리를 하고 온순하지만 영특하고 잔꾀가 많은 타입이다. 그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장자(큰아들)에게 가문의 축복을 해 주었는데 언제나 그 장자권이 탐났던 동생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형에게 팥죽 한 그릇과 그 장자권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장자권이란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바꾼다고 바꿔질까 생각한 형은 배고픔에 팥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맞바꾼다.
언제 들어도 밑지는 장사이건만, 배고픈 그 순간, 목마른 그 순간에는 모두 앞만 보이는 금붕어가 되는지, 별로 고민도 안하고 팥죽을 받아먹고 그대로 잊어버린다. 그 뒤의 이야기는 털이 수북한 형처럼 꾸미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몰래 가문의 축복을 모조리 받아버린 동생의 계략에 화가 난 형이 동생을 해치려고 하자, 어머니는 동생을 멀리 피신시키고.. 둘 다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는데, 그게 다 팥죽 한 그릇앞에서 태만하게 멈춰버린 이성 때문이다.
가끔 미혼의 친구들을 만나면, ‘어쨌든 너는 결혼했잖아’라는 말로 내 문제는 일단락 되는 경우가 있다. 결혼 –애-집- 이런 식으로 놓인 인생의 문제 중에서 바로 앞 문제는 해결했다고 보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결혼-애-집 이런 식으로 인생이 구성되지도 않을뿐더러 결혼이란 허들을 넘었다고 그래 결혼했으니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지, 라고 생각하는 당사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 각자의 눈 앞에 있는 문제만 보고 있을 것이다. 이미 넘은(?) 허들을 보고 있지 않다.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인생 도처에 있는데 결혼했잖아, 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육아가 너무 힘든 친구는 차라리 결혼 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아이를 원했으면서도 만나면 아기를 키우는 것에 대한 불평뿐이다. 결혼하고자 했으면서 결혼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한 친구는 결혼소식을 알리면서 “이제 소개팅 안 해서 정말 좋아”라고 말했다. 지긋지긋한 면접시험을 끝마친 것 같이 보였다.
당장 눈앞의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도 따듯한 바닐라라떼가 생각난다. 다 마셨다고 갈증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덥다 보면 내가 차가운 음료를 1잔 모두 마실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남기더라도 그 후에 일은 몰라, 일단 얼음이 들어있는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쭉 들이키고 싶은 갈증뿐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넘어야 할 ‘허들’로 보고 있는 이상, 앞에 있는 것들을 넘지 않으면 몇 초 후에 “삑”하고 시간초과, 퇴장, 이라고 외칠 것만 같다. 시간은 흐르고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내가 넘어야 할 허들인지에 대한 고민이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뛰어 넘는다.
남들이 모두 뛰어넘어가고 있는 촉박함 속에서 시간 때문에, 적정한 시기 때문에 일단 떠밀리듯이 허들을 넘어가 버리기도 한다. 일단은 넘자, 라고
미국의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 캐리는 어느 날 친구 아기의 첫 번 째 생일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된다. 아기의 건강을 위해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주인의 요청에 값비싼 구두를 현관에 벗고 들어간 캐리는 집에 갈 때가 되어 구두가 분실 된 것을 알게 된다. 구두를 변상해 주겠다는 친구에게 구두 값을 말하자, 구두 값을 변상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많은 돈을 구두에 쓰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진짜 삶’을 살면 그렇게 돈을 쓸 수는 없다는 비난을 듣고 오게 된다. 분실한 구두 값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비난 받은 것이 더 속상했던 캐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대변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일반적이지 않은 주기의 삶을 사는 여자들이 받는 편견과 사회적인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캐리는 그런 대우에 화가 나서 홧김에 빨리 나도, 하고 결혼을 서두른다거나, 나도 빨리 그 쪽 세계로 들어가야지 라고 생각한다거나, 성공한 커리어를 무기로 여자들끼리 적이 되길 선택하지도 않는다. 이쪽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상대에게 그녀는 청첩장을 보낸다.
“나도 결혼하기로 했어. 바로 나 자신과”
결혼 선물로 등록해 둔 것은 바로 분실한 그 구두, 마놀로 블라의 것이다. 이제껏 결혼과 출산을 축하하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친구도 그녀의 “결혼 선물”을 사러 매장에 가, 캐리가 분실한 것과 동일한 구두를 사서 보내야 했다. 결혼과 출산의 이벤트가 없어도 충분히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음을 이해시키는 위트 있는 이 에피소드를 나는 너무나 좋아한다.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집에서 아이들을 직접 돌보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모두 자신이 선택한 라이프 스타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아쉬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텐데, 가끔 그것을 서로를 비방하는 것으로 위안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오,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한 숨이 나온다.
결혼과 출산만을 축하하는 세상에서는 축하 받을 차례가 오지 않는 것도 서운한데, 그것이 마치 “나의 잘못”인 양 여겨질 때 여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결혼과 출산,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이 반드시 축하 받아야 할 일이라면 창작, 승진도 축하 받아야 할 일이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축하 받지 않으면 서운해 할 자격이 생기는데, 후자에 있는 사람은 축하는커녕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얼른 결혼부터 해야지”라는 충고만 잔뜩 듣게 된다.
모두가 한번씩 당장의 갈증과 배고픔 때문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걱정’과 ‘충고’라는 이름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당장의 것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마치 한 단계 앞서 나간 것처럼 우월한 태도로 ‘너도, 어서,’를 종용하는 말을 한다.
성급히 마셔버리고 후회하는 건 아이스커피가 적당하다. 결혼 같은걸 하고서 “너무 성급했나” 싶으면 정말 곤란하다.
그러니까 남에게 하는 충고 같은 건 “그래도 따듯한 걸로 하지,” 정도에서 멈추자.
일러스트 @황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