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를 읽고
우리는 더욱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치상으로는 점차 평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중하위 소득층에 속하던 사람들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대신 전 세계 1%의 소득은 성장했고 하위소득계층의 모수는 성장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국제사회가 점차 평등해져 간다"라는 구호 아래 불평등하게 살고 있다.
1년에 한 번 이상 꼭 듣는, 소리가 있다. 국민 소득 3만 불, 어렸을 때 1만 불 돌파 소식이 어찌나 국가적 자부심이었는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3배를 향해 간다. 내 소득도 세 배가 되었는가? 내 능력의 문제인 건가, 경쟁의 도태로서 결과물인 걸까? 선뜻 동감되지 않는다. 중하위 소득 계층이 무너지는 패턴의 지속적인 성장이라면 그다지 나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술진보가 싫은 것이 아니다. 초기 기술진보와 세계화, 이에 따른 정책의 변화는 분명 시민을 하나의 권력으로 묶어주었고, 이는 교육기회의 성장, 사회복지정책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서비스업의 발달은 고 숙련자와 저 숙련자 간의 소득격차를 점차 크게 만들었다. 이는 저임금 노동자 그리고 기술의 등장과 함께 더 양극화되고 있고, 노동자는 다시금 정치적 권리 역시 잃고 있다.
자본은 국경이 없다. 하지만 이주는 국경의 제한이 있다. 유럽의 경우, 노동력의 이동(이주)에 의한 압력과 상품의 이동(수입)과 자본의 이동(유출)에 의한 압력은 끊임없이 자국민에게 압박을 주었다. 하지만 자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시민에게 있지는 않았다. 결국 나타난 것은 중산층의 포퓰리즘이나 자국민 우선주의이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알고, 이 글을 읽는 이도 아는 당연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런 구조적 불평등에 이미 가진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보다는 가처분 소득(시장소득이 아닌) 교육을 평등화를 장기적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그토록 외우고 부르짖는 것처럼, 실질적인 기회에 대해서는 평등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의 품질, 이른바 학교 수익률 역시 평등화시킴으로써 개개인이 갖는 기초 자본에 대해서 동일하게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이다
책의 내용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많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많은 양의 데이터는 미처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하지만 읽고 나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상황 한 복판에 던져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가장 큰 축제이자 행사가 곧 돌아온다. 축제를 내 삶의 축제로 만들지, 아니면 어차피 불행해질 삶, 지나가는 휴일로 만들 건지... 문뜩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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