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멜로무비를 하루에 한 편씩 10일 만에 다 보게 되었다. 아직 2025년이 한참 남았지만 나에게 이 시리즈가 최고의 시리즈로 기억될 것 같다.
이 드라마는 무해하다. 그리고 담담하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흔히 말하는 빌런이 없다. 자극적인 내용도 없다. 아주 충격적인 사연들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더 와닿는다. 나의 최애 만화 H2에서 히카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씬처럼 담담하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연출했지만 그래서 자꾸 가슴을 쿡쿡 찌른다.
고겸(최우식분)과 김무비(박보영분)의 연애도 홍시준(이준영분) 손주아(전소니분)의 연애도 그렇다. 지지고 볶고 죽일 듯이 사랑하고 죽일 듯이 싸우고 그러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잔잔하게 흐르지만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느껴진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무해하다. 그 어떤 인물도 보는 사람을 정서적으로 힘들게 하지 않는다. 지치지 않고 끝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다.
고겸은 혼자가 되기 싫어서 누구에게나 밝고 친절하다. 우울함을 보여주면 자기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떠날까 봐 두렵지만 티 내지 않는다. 티 내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보던 영화는 그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연기는 꽝이다. 영화를 사랑하니까 현장을 사랑했고 영화를 사랑하니까 애정이 담긴 글을 쓸 수 있었다. 애정이 담긴 글을 쓰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타인의 창작물을 감상하고 평가하다 보면 그 자신도 모르게 창작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평론가로서의 고겸은 어떤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평론가 고겸의 마음은 영화감독을 애정한다. 그는 말한다. 글에는 표정이 없다고. 날카롭게 보였던 그의 글은 어쩌면 창작자의 다음 작품을 응원하는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고겸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형에 대한 사랑도, 무비에 대한 사랑도 헌신적이다. 고겸은 자신의 헌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고준도 마찬가지다. 20살의 나이에 9살 동생을 책임져야 했던 고준의 헌신도 조용히 고겸의 삶을 지켜준다. 고준의 삶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힘겨웠지만 동생과 함께하는 삶은 그 자체로 완성이다. 고겸을 위해 살았던 것 자체가 고준을 위한 삶이었고 고준을 지키기 위한 고겸의 노력 또한 고겸의 삶이었다.
아빠의 사랑을 갈구했던 김무비는 버림받는 게 두려워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늘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김무비는 누구보다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작고 가여운 것들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다. 툴툴거리고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아프고 약했던 우정후의 보호자를 자처할 때도, 형을 잃고 힘겨워하는 고겸을 위로할 때도, 손주아의 과거 연애를 들어줄 때도 한결같이 다정하고 선하다.
재수 없어 보이는 홍시준 역시 따스하다. 태생이 금수저라 지 밖에 모르는 것 같지만 방법을 모를 뿐이다. 감정이 늦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지만 진심이 가득하다. 자기 세계에 심취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사랑에 진심이다. 인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서툰 내면이 마치 어릴 적 내 모습을 닮아서 더욱 공감이 간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기를 인정하고 자기의 모든 걸 사랑했던 주아를 향한 시준의 진심은 누구보다 뜨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심은 주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손주아는 고준과 닮아 있다. 손주아는 시준이의 모든 걸 사랑했고 시준이의 모든 걸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본인이 사라지는 걸 느꼈던 것일까? 고준이 강으로 뛰어들었던 회차와 주아가 시준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차가 같은 회차인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시준과 이별을 택했지만 시준만큼 주아도 힘겨웠을 것이다. 시준은 떠나간 주아를 찾기 위해 5년을 보냈다면 주아는 7년 동안 잃었던 자기를 찾기 위해 5년 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다.
"멜로무비"라는 제목과 드라마가 참 잘 어울린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고겸과 버림받는 게 두려워 혼자가 되는 길을 택했던 김무비가 서로에게 동화되는 과정도 예쁘고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꼈지만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주아와 떠나 버린 주아를 찾아 헤맸고 다시 만난 주아를 놓아주는 시준이의 이야기도 절절한 이야기지만 담담하고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좋다. 격정적이지 않지만 그 모든 감정이 잔잔하게 스며들어서 좋다.
마감독님도 비디바의 사장님도 제작사 피디님도 무비 어머님도 다 너무 좋다. 그냥 특별하지 않지만 서로가 아껴주는 그 다정함이 자꾸 아른거린다. 드라마 곳곳에 흘러넘치는 평화로운 사랑이 아른거린다. 그래서 제목이 더 좋게 느껴진다. 끝내 주는 사랑 이야기. 멜로 무비. 사랑은 그 자체로 완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