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열두시가 넘기 전에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잘 준비를 한다. 영양제를 챙겨먹고 씻고 침대에 누워 다섯시에 맞춰둔 알람을 확인하고, 안대를 쓰고 잠을 청한다.
해가 뜨기 30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작업방 책상에 앉아 간단히 아침을 먹으며 글을 쓴다. 정해진 분량보다는 시간을 지키려 한다. 오후 열두시까지 앉아서 뭐라도 쓴다. 한시쯤에는 마무리를 하고, 1시간 정도 낮잠을 잔 뒤 빨래나 청소를 하고 오후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린다.
-가 목표하는 하루다. 책에도 여러번 썼고, <베개는 필요없어,네가 있으니까>를 비롯해 꽤 많은 분량의 글과 그림을 저런 루틴을 통해 남겼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몇달째 루틴따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제도 그랬다. 어김없이 열두시에 누워 내일은 기필코! 결심하며 잠을 청했다. 어찌저찌 잠들긴 했는데, 얕은 잠이었는지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내 한쪽 눈이 새파랗게 변해서 엉엉 울며 누군가에게 찾아가는 꿈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꿈의 잔상을 지우려고 휴대폰을 켰다. 시계의 숫자는 2시 40분. 두시간 정도 푹 자면 다섯시에 맞춰 일어날 수 있을거야.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시작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나의 생각을 외면하면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조용하고 아늑한 침대 속인데, 내면에서는 감정이 요동치고 폭풍이 분다. 새벽에는 뇌의 전원을 꺼버리고 싶다. 잠 못드는 밤의 고독과 불안으로 낭비한 생명력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 시간에 육체를 충분히 쉬게 하고 개운하게 일어나 그 정신력으로 하루를 살았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을 훨씬 가치있게 잘 활용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내 천성이 그럴 수 없는 인간임을 스스로 잘 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루틴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몇배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도.
결국 두시간을 넘게 뒤척이다가 그냥 일어났다. 4시 50분이었다. 알람을 끄고, 부엌에서 차를 내리고 빵을 구웠다. 그리고 다섯시 반, 지금 글을 쓴다.
어찌보면 오늘은 반쯤의 성공일까? 어떻게든 오전 글쓰기는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새벽의 잡념에 두손두발 다 들고, 차라리 피곤함을 짊어지고 할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영 착찹하다. 어제를 잘 마무리 하고 미련과 공허의 마음을 지우고선 새로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여섯시간 생을 멈췄다가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쓰는 글이 오전 글쓰기인데.. 이 아침의 나는 여전히 어제에 살고 있다. 이건 실패담이다. 하지만 성공을 위한 실패담이라 합리화하고, 글을 쓴다.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아침 ASMR'을 틀어두었다. 카페에서 적당히 웅성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좋다. 노란 버터를 바른 빵을 씹으며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는 감각. 몸에 베어있던 그 익숙함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 루틴의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있다. 수백번의 아침을 이렇게 보냈었다. 스스로의 약속과 노력을 통해 남겼던 수많은 아침의 글을 기억한다.
반복과 꾸준함의 힘. 반복된 실패는 반복된 시도에서 오는 거니까,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포기는 안해. 오늘같이 반쯤 실패한 날도 나쁘지 않다. 천천히, 내일 또 하면 되지 뭐.
아래는 지난 아침들의 기록.
1.
우울해지거나 사는 게 막막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오늘 같은 새벽을 맞이한다. 잠들려고 애쓰거나 잠 깨려고 하는 시간의 낭비가 없는 하루. 이런 새벽에는 좋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치 새로 태어난 삶처럼.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힘을 내고, 좀 더 건강한 음식들을 고민한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면서 오늘의 할 일들을 천천히 적어본다. 오늘은 포트폴리오를 정리해 볼까, 그리고 싶은 것과 아쉬운 부분들을 고민해 봐야지. 휴지도 새로 주문하고, 이불도 빨고 베개커버도 갈아야겠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밖은 아직 어둡다. 해가 뜨기 한시간 전. 창가의 화분을 살펴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생긴 걸 발견했다. 세상에, 꽃이 피는 식물이었다니! 너무 놀랍고 기뻐서 엄청 환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이다.
2.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너무 이르지만 그냥 일어나서 토마토 주스를 갈아먹고 물을 끓이고 일기를 썼다. 스타벅스 프리퀀시로 모은 다이어리에 매일매일 기상 기록과 루틴을 적고 있다. 잠들기 전 새벽엔 욕심과 후회가 나를 괴롭히지만 깨어난 새벽엔 세상만사 관대해져서 어떤 나라도 괜찮은 것만 같다. 삼십 몇년을 새벽형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새벽형 인간은 맞는데 안 자고 깨어있는 새벽이 아니라 자고 일어난 후 새벽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바뀐 것인지.
3.
별일없이, 흔들림없이. 매일매일 같은 루틴으로, 매일매일 같은 각오로.
4.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는 단톡방에 오전 9시부터 알람이 울렸다. 런던에 있는 사람에게서 발레공연 사진이 왔고 낙산사에서는 일출 사진이 왔고 동네에서 오징어 짬뽕 브런치 사진이 왔다. 나는 집 책상에 앉아 런던 심포니의 드보르작을 듣고 있다고 했다. 괜찮은 사람들의 괜찮은 아침 안부들.
5.
인생에 대한 말이 뭐가 있지 하고 메모장을 뒤적였다.
/ 신체를 돌아보고, 식사와 수면에 신경을 쓰고, 일상 생활을 단순화하고, 사교 활동을 삼가고,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라.
/ 아침과 저녁에는 때에 맞는 활동을 하고, 열정을 가지고 집중해서 탐구하라.
/ 되도록 신선한 공기속에서 지내라. 낮이나 밤이나 신경 써서 창문을 활짝 혹은 일부 열어두는 것, 자주 숨을 깊에 들이마시는 것.
/ 매일 운동해야 한다. 잉글랜드 의사의 격언을 기억하라.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반드시 아픈 시간이 있을 것이다."
/ 식사에 신경을 써라. 사유하는 이는 소화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 수면에는 더욱 신경을 써라. 너무 많이 자지도 말고 너무 적게 자지도 마라. 자신에게 수면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내고 수면시간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하라.
/ 읽기와 기억하기, 노트하기, 글쓰기와 관련해서도.
/ 잘 살려는 노력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공부하는 삶,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앙주
오래 전에 기록해 둔 글인데, 어느덧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든다. '잘 살려는 노력을 부끄러워 하지 마라.’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며 사는지를 당당히 자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6.
어젯 밤 집으로 오는 길이 너무 외로웠다. 그에게 연락하고 싶고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때까지 너무너무 그랬지만 베개를 꼭 안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기 전 눈을 떴다. 물을 끓이고 일기를 기록하고 책상 앞에 앉으며… 안도했다. 자니..? 같은 연락을 하고 아침에 이불킥 하며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이 평화를 깨버릴 뻔 했다. 인생 모 있냐며 마음가는데로 실수도 하는거지! 하는 건 밤의 시간 뿐이다. 밤에는 요정이 마법을 부리듯 사람을 혹하게 해서 평정심이 흐려진다. 작년에 팟캐스트 책읽아웃에 나갔을 때, 사실 실수 좀 하고 싶어요! 그랬는데 아니, 이젠 최대한 실수 안하고 싶다. 나의 이 평화를 무너뜨리려면 사랑 정도는 되어야지. 실수로 깨버리기엔 요즘의 이 단단한 하루들이 너무 소중하다.
'밤은 길고 외롭습니다' 라는 책의 제목처럼, 밤은 길게 두면 외로워진다. 아침의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밤의 시간을 최소화 하고,아침을 길게 살아야 한다. 어젯 밤은 숨어있던 외로움이 와인 몇잔에 고개를 내밀고 투정을 부린 날이었다. 무사히 아침을 맞이하자 외로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침에는 공유같은 도깨비가 마법을 부리나 보다. 아침의 삶을 사는 삼십대, 인생 2회차 같은 기분. 술 취해서 울며 불며 전화하던 이십대의 새벽이여. 정말 내가 그랬었니? 왜 그랬니.
7.
일곱시 십분에 잠이 깼지만 눈을 뜨고 일어나는데까지 좀 걸렸다. 어제 너무 늦게 잠들었다. 힘없이 일어나서 무작정 설거지를 하고 책상앞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토요일. 나는 거실로 출근하는 프리랜서라 평일과 주말이 없다. 오늘도 그냥 똑같은 하루를 지켜야 한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왜 토요일 일요일이 반 페이지뿐인가. 주말에 쓸 이야기가 더 많을 수도 있지 않나? 일기를 아껴써야 하다니. 잠이 조금 부족하다. 조금 더 자야할 것 같다. 하지만 열시까지 만이라도, 무엇이든 쓴다.
8.
아침은 빈 종이 같다. 내게 종이는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주는 존재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연필을 손에 쥐고 울었던 적이 있다. 빈 화면 위에 한 글자씩 글을 써 내려가는 일도 그렇다. 매일 글을 쓰고 있지만, 정작 해야 할 이야기들은 쓰지 못하고 있다. 못다 한 이야기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있을 것이다. 꿈만 같던 나의 진짜 경험들. 사라질 리가 없다. 그렇게 강렬하고 특별했던 순간들이었는데. 화석을 발굴하듯 살살 조금씩 형태를 다듬으며 꺼내야 한다. 여기까지 오늘의 일기가 1258자. 그러니까 하루에 일기는 1000자, 원고는 2000자 이상 쓰는 것으로 목표를 잡아보기로 했다.
지난 밤 무슨 꿈을 꾸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은 늘 사라진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지만 손을 움직여야 한다.
<리추얼> ✍️
1. 괴테는 하루 종일 글을 썼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나이 든 후에는 아침에만 창작에 필요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침의 시간에도 그럭저럭 한 페이지를 채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계속 작업했다. 그는 억지로 글을 쓰려 애쓰지 않았고, 빈둥대며 시간을 보내는 게 낫다고도 했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 글을 썼다.
2. 윌라 캐드는 아침이 글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며, 오후와 저녁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고 공연장에 가거나 친구를 만났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머릿속에서 글을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그는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만 작업했다. 그 이상을 작업해도 얻는 게 별로 없으며, 글을 쓰는 유일한 이유는 경험한 어떤 일보다 글쓰기가 가장 재밌기 때문이라고 했다.
3. 조이스 캐럴 오츠는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썼다. 그는 50편의 장편 소설과 36편의 단편, 수십여 권의 시집, 수필, 희곡을 발표했다. 그는 하루 종일 작업해서 겨우 한 페이지를 완성하더라도, 그 한 페이지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4. 스티븐 킹은 휴일은 물론 생일날도 글을 쓴다. 아침 8시나 8시 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11시 30분 전에 끝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난다. 하루 2000단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는 책상 앞을 떠나지 않는다.
5. 톨스토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며, 성공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봉현읽기 012.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