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 계획이 있다구
꽤 자주 계획을 변경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변경은 매우 계산적인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치과에서 사랑니 발치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다음 날이 운전면허 시험날이었고 그 다음 날엔 그림 마감이 있었다. 치과를 미루고 유튜브를 보면서 잠을 푹 잤다. 시험은 떨어졌는데, 허탈함은 후루룩 내버리고 새벽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떨어진 시험이야 다시 보면 되고, 치과는 미룰 수 있었지만 마감은 절대 미룰 수 없다.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계산하고 하루와 일주일을 계획한다. 그 계획 또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여유의 텀을 두고.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최대한 일정을 여유롭게 두고 유동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과 몸을 학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한다. 일정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되거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거라는 예감이 들면, 쉬는 시간을 붙여 넣는 것까지가 그 일정의 완료 지점이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모든 것을 쏟아가며 모든 것을 다 해 낼 수 없다. 예전에는 욕심만 앞서 몰아붙이듯 다 하려다가 오히려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했었다.
'최선을 다한다'라는 표현이, 내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낸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충 하지 않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안될 거 같으면 욕심내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작하고 끝을 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자주 깨닫는다. 나의 능력, 나의 시간, 나의 한계를.
마음처럼 안되는 게 너무 많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이 너무 어려울 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복잡하게 얽힐 때, 다들 잘만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허탈함에 기운이 빠진다.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럽거나, 나한테 화도 난다. 노력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그리고 탓해봤자 무엇 하나. 포기하거나 계속하거나 그뿐.
할 수 없는 것을 앞에 두고,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해 나간다. 좌절의 반복 같기도 하고, 끝없는 굴레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허리를 바로 펴고, 계속 손을 움직이고 또 걷는다.
실패의 반복이 아니라 성공의 단계야.
실패를 계획하는 사람은 없지만 실패하지 않고 해내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어.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처럼 '넌 다 계획이 있구나' 이것도 내 계획의 일부일 뿐이라고 합리화하자. 실패도 계획에 넣을 수 있다면 좌절하지 않는다. 계획된 실패였으니까. 그마저도 괜찮다고,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나에게 화이팅을 외친다.
열두시가 넘기 전에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를 적는다. 오늘의 성취를 기록하고 실패에는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내일의 계획을 적는다. 그 계획은 자주 화이트로 지워지고 다른 단어로 채워지지만,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내가 전하는 인사. 다이어리를 덮으면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요즘 마음에 와닿는 글은 누군가의 실패담이다. 실패는 끝 지점이 아니라는 말을 되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