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감정을 데리고 움직인다.
태국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말레이시아 남쪽 끝, 조호르바루로 넘어왔다.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의 인상은 묘하게 익숙했다.
도시의 결은 부산과 닮아 있었고, 그 사이로 어지러울 만큼 많은 고층 빌딩이 솟구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공사 소음이 끊이지 않았고, 마치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지금 ‘성장’보다 ‘팽창’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렸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50층 규모의 오피스텔이었다.
탑층에 있는 헬스장에서 러닝을 할 때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도시가 발아래 펼쳐져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10층과 탑층엔 수영장이 있었지만, 청결 상태가 좋지 않아 발 한번 담그지 못했다. 대신 층고가 높고 층간소음이 없어 집 안에서는 꽤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문제는 밤이었다.
앞 건물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매일 잠을 설쳤다.
도시의 생동감과 소란은 종종 공존하지만, 이곳에서의 밤은 유난히 길고 떠들썩했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다.
말레이인, 중국계, 인도계, 그리고 수많은 소수 민족들까지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산다.
이들의 언어와 음식, 종교와 명절이 도시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그 다양성은 매력적인 동시에 복잡했다.
공식어는 말레이어이지만 중국어, 타밀어, 영어가 뒤섞여 쓰인다.
여기에 ‘망글리시(Manglish)’라는 독특한 변형 영어까지 있으니 소통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서로 못 알아듣는다.
결국 번역기 도움 없이는 대화가 되지 않아, 처음에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음식의 세계는 훨씬 다채로웠다.
그중 가장 자주 먹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의 국민 음식인 ‘나시르막(Nasi Lemak)’.
코코넛 밀크로 지은 밥 위에 삼발 소스, 멸치볶음, 땅콩, 오이, 계란을 올리면 완성되는 단순한 구성인데, 의외로 조화가 좋았다. 양철 도시락에 담겨져 있는 상상을 해보면, 옛날 도시락이 떠올라 괜히 그립기도 했다.
2월의 말레이시아는 전형적인 여름이었다.
아침의 강한 햇살과 한낮의 뜨거운 열기, 그리고 예고 없이 쏟아지는 폭우까지..
자연의 기분에 따라 하늘의 표정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쇼핑몰과 음식점이 있었던 것은 생활의 큰 장점이었다.
다만 대중교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그래서 대부분 그랩이나 볼트를 이용해야 했는데, 퇴근 시간대엔 요금이 순식간에 배로 뛰었다.
한국처럼 정해진 미터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지만, 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우리도 이곳의 규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호르바루는 싱가포르와 단 두 개의 다리(코즈웨이, 투아스)로 연결된다.
바로 그 지리적 이점 덕분에 물가는 저렴하면서 생활환경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싱가포르에서 유입되는 돈, 사람, 문화가 도시를 빠른 속도로 바꾸고 있었고, 데이터센터 건설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난개발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부유함의 그림자가 도시의 성장과 얽혀 있었다.
우리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당가베이(Danga Bay)’였다.
해운대와 닮은 느낌의 여유로운 바닷가.
바다를 따라 산책길이 잘 만들어져 있고, 주변에는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호텔 로비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가 있어 우리에게는 잠시 쉬어가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단연 싱가포르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차로 30분이면 국경을 넘는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다리 하나를 건너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높고 반짝이는 금융 빌딩들,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 풍경, 두 배가 아니라 다섯 배도 넘는 물가.
그 차이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MRT(지하철) 래플스 플레이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멀라이언 파크.
싱가포르의 상징 멀라이언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우리는 그 물을 받아 마시는 듯한 ‘관광객 인증샷’을 남겼다. 낯부끄럽지만, 사람이 여행지에서 허락할 수 있는 유치함이라는 게 참 좋다.
이후 '마리나 베이 샌즈'를 지나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향했다.
거대한 슈퍼트리들이 숲처럼 서 있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우리가 노린 것은 바로 밤 8시 ‘가든 랩소디’ 라이트 쇼.
음악에 맞춰 나무들이 빛을 내뿜는 장면은 마치 미래 도시의 축제를 보는 듯했다.
이 화려한 공연이 무료라는 사실에 더 놀랐고, 동시에 자리 경쟁이 치열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조호르바루에는 레고랜드도 있다.
아시아 최초의 레고랜드로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명소라고 했지만, 우리의 여행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 방문하진 않았다.
한 달을 살아보니, 조호르바루는 매력도 많지만 우리의 생활 방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날씨, 거리의 공기, 생활 편의성, 도시의 에너지.. all of them.
여행으로서의 즐거움은 있었지만, ‘살고 싶다’는 감정과는 조금 달랐다.
이제 다음 여정인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또 다른 도시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를 품으며 조호르바루에서 희노애락을 담은 한 달을 천천히 덮어본다.
– 낭만봉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