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살이의 첫 장, 세르비아에서 머문 한 달

느리게 걷고, 많이 바라보며, 오래 머문 한 달

by 낭만봉지 김봉석

한국에서의 세 달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유럽살이의 첫 문을 열 준비를 했다.


세르비아를 시작으로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크로아티아까지.


구글맵에 표시된 깃발들,

총 8개월의 여정 속에는

'꿈을 좇는 여행'이라는

우리의 확고한 모토가 새겨 있었다.


2025년 7월 9일,
이른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인천공항 노숙을 선택했다.
열심히 검색해 찾은 노숙 스팟에 자리를 잡고
의자에 몸을 기대자
허리는 새우처럼 자연스럽게 접혔다.
처음 겪는 공항의 밤은
낯설었고, 불편했고,
그만큼 이 여행이 진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른 새벽,
뻣뻣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탑승 수속을 마쳤다.
폴란드를 경유해
장장 17시간 만에 도착한 세르비아.
바르샤바 공항에서의 짧은 환승 시간은
괜한 긴장을 안겼지만,
결국 우리는 무사히 베오그라드에 닿았다.


니콜라 테슬라 공항에서
A1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하자
정류장에 노년의 멋쟁이 부부 호스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미소 하나로
이 도시가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


한 달간 머물 숙소는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의 꼭대기층,
다섯 층의 계단을 헐떡이며 오르는 동안
‘괜히 무리했나’ 싶었지만
문을 열자 펼쳐진 테라스 풍경은
그 생각을 단번에 지워주었다.

멋진 풍경과 달리

이곳의 낮 기온은 40도를 웃돌았다.

세탁한 옷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마를 정도였지만,

다행히 건조한 그늘 아래에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오아시스와 같은

상쾌함을 안겨 주었다.


서유럽만큼은 아니어도
외식 물가는 분명 부담스러웠다.
대신 시장 물가는 놀라울 만큼 저렴했다.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의 그린마트.
신선한 채소와 과일, 치즈와 생고기가
한국의 재래시장처럼 진열돼 있었다.


영어보다 세르비아어가 더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우리는 말 대신 몸짓과 표정을 꺼내 들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광대처럼 소통했다.
웃음이 만국공통어라는 말을
이곳에서 실감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그린마트)

세르비아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목소리는 크고, 몸짓은 크며,
처음엔 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차례의 전쟁과 파괴를 견디며
도시를 다시 세운 사람들만의
단단한 자부심과 회복탄력성이 담겨 있었다.

가끔 시장 인심이 슬쩍 드러날 때면
그들의 순수함이 조용히 전해졌다.


베오그라드는
대중교통 무료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버스와 트램을 자유롭게 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도시를 부담 없이 누빌 수 있었다.
낡은 트램은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창문을 열고 달려야 했지만
그조차 이 도시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또 타고,
그렇게 이동 자체가 여행이 되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트램)

공화국 광장은
베오그라드의 심장이었다.
해 질 무렵,
미하일로 대공의 기마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고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은
조명 아래에서 고전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버스킹 음악과
기다림의 설렘이 섞인 그 거리는
이 도시가 얼마나 살아 있는지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 & Kneza Mihaila 거리)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만나는

요새(Belgrade Fortress)의 끝자락은

도시에서 가장 붉고 찬란한

노을을 선사하는 장소였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강물 위로 오렌지빛 윤슬이 흩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요새에 조명이 켜지면,

세월을 견딘 돌벽들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역사의 무게를 담은 실루엣과

야경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가장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요새)

‘베오그라드의 바다’라 불리는
아다 치간리야(Ada Ciganlija)에서는
가장 평온하고 서정적인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네를 타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풍경 속에 녹아 있었다.


숲의 향기와 선선한 공기가 어우러지고

도심의 소음을 지우는

자연과 휴식만이 존재하는 마법 같은 곳.


호숫길을 걷다 보면

베오그라드 사람들의 진정한

여유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Ada Ciganlija)

그렇게
우리의 33박 세르비아 일정은 끝이 났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유럽의 감성과 저렴한 물가,
그리고 무엇보다
편리한 교통과 느린 일상은
한달살이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세르비아는
우리를 놀라게 하기보다
머물게 했고,
속도를 늦추게 했으며,
다음 여정을 서두르지 않게 만들었다.


유럽살이의 첫 장은
그래서 이곳이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시작하라는,
그런 도시의 방식처럼.


다음 목적지는

북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이다


호수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도시.


그렇게 유럽살이의 두 번째 여정이

우리를 기다린다.


- 낭만봉지 -


[33박, 그리고 숫자로 남은 기록]

2025년 7월 9일 ~ 8월 11일,

총비용 2,597,724원.
(2인 기준 / 항공료 제외)

숙소 : 1,107,724원

외식 : 162,853원

장보기 : 960,953원

카페 : 32,116원

쇼핑 : 322,455원

교통 : 11,623원(공항버스)

순수 생활비(쇼핑제외) 약 220만 원.
하루 평균 약 7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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