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

한국에서 보낸 세 달, 한 번의 수술,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것

by 낭만봉지 김봉석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동남아 세 나라, 여섯 개 도시를 여행하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났기에,

돌아온 우리에게는 머물 집부터 다시 필요했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삼삼엠투’라는 플랫폼을 통해
호평동의 한 아파트를 계약했다.

연식은 오래됐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었고,
집 곳곳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을 배려한 흔적이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에서 세 달을 보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갑자기 높아진 숫자들

베트남을 마지막으로 한국에 들어와서였을까.
물가는 체감상 두 배쯤 뛰어 있었다.


장이라도 봐서 해 먹어야 아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아직 요리에 서툴렀다.


그래서 우리의 생존 전략은

조금 부끄럽지만 ‘기생’이었다.


호평동은 지리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처가, 본가와 근접한 위치라서

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었고
반찬과 먹거리를 공수하기에

이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먹을 걱정을 조금 내려놓고,
우리는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소소하지만 즐거웠던 시간

호평평내역까지는 도보 8분.
대중교통이 편리해

춘천까지 경전철을 타고
닭갈비를 먹으러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사소한 자유는
지금의 우리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즐거웠다.


호평동 중심가에는
병원, 이마트, 다이소, 식당들이 모여 있었고,
외식비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어떤 곳은 소주 한 병이 1,900원이었다.


내천을 따라 러닝 하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는 뛰었다.
러닝 붐이 괜히 붐이 아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소하고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평온을 흔든 신호

그러다 예기치 못한 일이 찾아왔다.
아내의 하혈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맥도널드에서
아내가 갑자기 저혈압 증세를 보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19를 부르려던 순간,
의자에 잠시 누웠던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증상은 더 심해졌고,
결국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진단 결과를 전하는 선생님의 어조는

담담하면서도 냉정했다.

근종의 위치가 좋지 않아
하혈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었다.


7월부터 해외살이를 계획하고 있던 우리에게
그 말은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수술이 필요했지만

당장 가능한 일정도 없었다.


선택의 시간

우리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한참을 고민하신 끝에
다행히 방법을 찾아주셨다.


간신히 잡은 수술 날짜는 5월 30일.
7월 9일, 세르비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빠른 회복이 중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비용 부담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실비보험이라는 작은 희망에 기대어
로봇 복강경 수술을 선택했다.


그렇게 아내는 생애 처음으로
전신마취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수술실 앞에서

긴장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잘하고 와.
자고 일어나면 끝났을 거야.
난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내는 병실로 옮겨졌고
마취가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였다.


간호사가
마취 가스를 배출해야 하니
두 시간 동안 잠들지 않게

계속 심호흡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천천히, 깊게 숨을 쉬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아내의 얼굴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17년을 함께 살면서
처음 보는 얼굴 표정이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암 투병을 지켜보던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또다시 지켜봐야 하다니..


“난 여기까지인가 봐..”

아내는 쏟아지는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말했다.

“난 여기까지인가 봐..”

마취제에 취한 듯

비몽사몽 한 얼굴로 아내가 중얼거렸다.

포기하고 자야겠다는 뜻을 애틋하게 전달하려는

초점 없는 눈빛이 마치

개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아내도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웃픔을 나누며

그 시간을 이겨냈다.


3일의 입원 후 퇴원.
이후 염증과 장염으로

몇 차례 재입원이 있었지만
아내는 굳은 의지로 버텨냈다.


그리고 결국,

아내는 건강을 되찾았고,

예정된 7월 유럽살이를 준비할 수 있었다.


여행보다 중요한 것

여행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우리는 그해 한국에서 배웠다.


아내의 병치레로
한국에서의 세 달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계획했던 일정은 수없이 바뀌었고,
기다림과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병원 대기실의 공기,
수술 날짜를 기다리던 밤들,
아무 일 없는 척 서로를 바라보던 시간들까지
모두가 우리의 하루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했다.
망설임 끝에 내린 결정이었고,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탁월했다.


건강을 되찾은 아내는
이제 나에게
그 어떤 여행지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이렇게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여행은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고,
못다 한 즐거움은
언제든 다시 채울 수 있다.

지도 위의 목적지는 남아 있고,
비행기는 다시 이륙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함께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있다는 것,
건강한 몸으로
다음 여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함께 건강한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면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 낭만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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