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가 맞닿은 자리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오흐리드에 온 여행자라면
꼭 가봐야 한다는 곳이 있다.
세인트 나움 수도원 (Saint naum Monastrey).
호수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까지는
생각보다 긴 여정이 필요했다.
차는 산을 감아 도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시간가량을 달렸다.
창밖으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숲과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오흐리드 호수의 푸른빛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긴장과 기대가
겹겹이 쌓이던 산길의 끝에서,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광활한 주차장.
빼곡히 늘어선 차들의 행렬.
이 외진 곳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품고 있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했다.
버스에서 내려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는 것을.
산과 호수가 맞닿은 경계에
의연하게 서 있는 파수꾼처럼,
수도원은
천년의 세월을 품은 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대지가 들려주는 깊은 기도를
가만히 듣고 있는 듯했다.
수도원 아래로 흐르는
산새의 계곡물은
믿기 어려울 만큼 맑았다.
바닥의 작은 모래알갱이까지
또렷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물은 소리를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흐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낮추고 가라앉혔다.
나는 한참을
그 물 위에 시선을 두었다.
여행자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피로와 생각들이
투명한 물결에 비쳐
하나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수도원의 뜰에는
공작새들이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지도,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
우아하게 흔들리는 깃털은
이곳의 시간이
우리와는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고풍스러운 돌벽 사이로는
오래된 향 내음이
은은하게 스며 있었다.
돌에 밴 세월의 냄새,
기도의 흔적,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신앙의 숨결.
이곳은
과거의 유적이 아니었다.
지금도 분명히
살아 숨 쉬는
영적 안식처였다.
수도원의 정문을 지나자
가장 이국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를 올리는 신자들 앞에 놓인
큰 양철통.
그 안에는
굵은 촛대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촛불에 불을 붙이고
짧은 기도를 올린 뒤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유리잔도,
정갈한 촛대도 아닌
투박한 양철통 위에 세워진 빛.
하지만 그 불꽃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더 원초적이고,
더 간절해 보였다.
촛불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공기는 미묘하게 떨렸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대지가 들려주는 깊은 기도란
어쩌면
이런 소리 없는 장면 속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수도원의 끝자락에 서자
오흐리드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호수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푸르고 광활한 풍경.
끝을 알 수 없는 수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이곳에서는
생각도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숨을 고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세인트 나움 수도원은
화려하지 않다.
자극적인 볼거리도,
요란한 설명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천년의 세월이 쌓아 올린 고요함,
자연과 신앙이
조용히 맞닿아 있는 균형,
그리고 그 안에서
여행자의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여백.
그래서 이곳은
내게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지친 마음을 쉬게 하고,
흐려진 감각을 다시 깨우는
힐링의 공간.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잠시 환기시켜 주는
영적 쉼표였다.
오흐리드의 남쪽 끝에서,
나는 다시 한번
조용히 숨을 고르고
천천히 돌아설 수 있었다.
- 낭만봉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