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잠들지 않는다

붓으로 남긴 아버지의 신앙 고백

by 낭만봉지 김봉석

사랑은 깨어 있고

혼수상태로 잠들지 아니한다.

어려워도 피로를 느끼지 않고

기운이 소진해도 쓰러지지 않으며

공포를 느껴도 요동하지 아니한다.

Amor vigilat, et dormiens non dormitat;

Fatigatus non lassatur, arctatus non artatur,

territus non conturbatur;


깨어 있는 사랑에 대하여

아버지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신 뒤에야
나는 아버지의 그림을
‘작품’이 아니라
‘고백’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가톨릭 화가였다.


말보다 붓이 먼저였고,
설명보다 침묵이 길었던 분.


성경의 문장과 신앙의 언어는
아버지의 손을 거쳐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들은 언제나 단정했고,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이 말은 가볍게 그려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고기, 가장 오래된 고백

그림 속 물고기는

가톨릭의 상징, 익투스였다.


박해의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몰래 나누던 표식.


아버지는 그 물고기를
화려하게 그리지 않았다.


색은 거칠었고,

붓질은

투박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물속에 있으되
물에 휩쓸리지 않는 형상.


나는 그 물고기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믿었던 신앙이
‘위로’라기보다
‘버팀’에 가까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은 왜 깨어 있어야 했을까

그림 한켠에 적힌 문장.


『준주성범』 제3권 제5장,

몇 번을 읽어 봤지만

사랑을 감정으로만 이해하던 나에게
이 문장은 늘 낯설었다.


사랑이 어떻게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이 어떻게
공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기분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다시 선택하는 태도라는 것을.


오늘을 건너는 나의 이정표

요즘의 나는
아내와 함께 길 위에 있다.


낯선 도시에서 아침을 맞고,
지도를 보며
오늘 걸을 길을 정한다.


여행은 늘 자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의 연속이다.


피곤해도
걸어야 하고,


의견이 달라도
조율해야 하고,


불안해도
함께 같은 방향을 봐야 한다.


그럴 때마다
문득 아버지의 그림 속
그 물고기가 떠오른다.


잠들지 않는 눈으로
물속을 헤엄치던 형상.


사랑은 도망치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책임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깨어 있으려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오래전에
붓으로 이미 남겨두셨던 것 같다.


잠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아버지는 떠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믿었던 사랑은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랑은 지금도
그림 속 물고기처럼
내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눈을 뜨게 하고,


피로해질 때마다
곁을 지키게 만드는 힘으로.


아버지가 남긴 것은
그림이 아니라
잠들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사랑을 안고
아내와 함께
다음 길을 걷고 있다


- 낭만봉지 -


(잠들지 않는 사랑을 물고기에 담아. 故 김성규 토마 화백이 남긴 영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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